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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비스

[전력][릭별][아우릭] 주황빛의 허공

by ___hashi___ 2020. 2. 8.

차가운 새벽의 바람이 불었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창백한 입김이 천천히 피어올랐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아. 모두가 잠든 시간. 나는 잠이 달아난 몸을 이끌고 천천히 옥상으로 향했다. 잠을 자려고 노력하기는 했다. 눈을 감고 시간의 공백 속에서 가만히 누워있었으니까. 하지만 끝내 일어나고야 말았다. 오늘은 몸을 너무 많이 움직였어. 신전 청소를 하느라 바빴고, 에테르 잠식 지역도 다녀왔다가, 대별지기님한테 보고도 해야 했고. 너무 정신이 없었어. 그걸 다 어떻게 오늘 안에 끝냈지? 그러나 혹사한 몸은 오히려 반항하듯 점점 더 기운이 넘쳤다. 잠을 자지 못 한 온 몸은 아리도록 아팠지만 별 수 없이 생활관의 옥상으로 향했다.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으니까.

신전의 가장 뒤에 자리한 생활관의 옥상은 그 위에 올라서면 수도를 모두 내려다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높았다. 이 세계에도 달이 뜨는구나. 내가 살던 세계에서 자주 보던 보름달과 똑같은 모습의 달. 엔지와 계약을 맺은 이후, 처음으로 보는 달이다. 차갑게 빛나는 달을 보자 저게 내가 건너온 세계와 나의 유일한 연결고리 같다는 생각에 잠시 코끝이 아렸다. 하지만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지. 모두가 애쓰고 있기도 하고. 게다가 엔지와 약속했으니까.

잠시 탁 트인 옥상 바닥에 앉아 그저 빛나기만 하는 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늘은 수호성 라스 알게티가 뜨는 날. 주황빛의 눈동자를 가진 카이사르와 아우릭을 떠올렸다. 맑으면서도 강렬하게 빛나던 그 눈. 아직 별의 아이들의 눈이 갖은 색으로 빛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팔을 쓸어 내렸다. 겉옷을 입고 올 걸 그랬나. 싸늘한 공기에 몸을 움츠리는데 뒤에서 뜬금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별지기님, 여기서 뭐해?

아. 들켰다. 나 스스로도 무엇을 들켰는지 모르는 채로 괜히 뜨끔했다. 이 목소리는. 매일 뺀질거리며 놀러 다니기만 하는 어느 단장의 것인데. 어색한 마음에 베실베실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내 뒤에는 아직도 제복을 벗지 않은 아우릭이 웃으며 서 있었다.

와. 별지기는 잠도 안 자는 거야? 아직도 일하는 중? 옷은 잠옷 같은데?

맞아요. 일 때문이 아니라, 잠이 안 와서 와봤어요. 달도 떴고. 단장님이야 말로 집으로 안 가세요? 아직도 제복을 입고 계시네요. 지금 시간이......

응! 새벽 두 시가 넘었어!

하하.

시간 개념 같은 건 일찍 마음속에 접어 두었다는 말투로 툭 내뱉는 아우릭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옷은 갈아입지 않는 걸까.

음. 집으로 가봤자 재미있는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거든. 아까 현관까지 가기는 갔는데, 도저히 그 꽉 막힌 분위기를 참을 수가 없어서 여기로 돌아와 버렸지! 와보니까 잠옷이 없네. 뭐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오늘은 달이 뜨는 날이잖아? 게다가, 라스 알게티의 날이기도 하고!

주황빛으로 빛나는 눈이 활짝 휘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정말, 단장님다워요.

음. 칭찬인가? 고마워! 그나저나, 안 추워? 여기. 겉옷정도는 빌려줄 수 있는데?

단장님 추우시잖아요. 괜찮아요.

아니! 이런 호의를 가볍게 걷어차면 안 되는 거라구?

걷어찬 적 없어요.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나는 그의 겉옷을 받아 들고 살짝 어깨에 둘렀다. 아. 가볍게 어깨에 얹으려 했던 건데도, 옷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맨날 이런 무거운 제복을 입고 다니는 건가. 잠시 옷깃을 매만졌다. 자기 몫의 짐을 견뎌내기란 얼마나 쉽지 않은가 하는 생각과 함께.

별지기, 나랑 춤 안 출래?

네? 갑자기요?

응. 갑자기 같은 게 어디 있어? 추고 싶으면 추는 거지. 재미있잖아?

등장만큼이나 뜬금없는 말에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렬하게 빛나는 주황색의 눈을 보면서. 아. 이런 사람이었지. 잠시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저. 근데 저는 춤 출 줄 모르는데요......

괜찮아! 내가 리드할테니까.

그리고는 나의 손을 맞잡고 내 허리에 다른 쪽 손을 둘렀다. 춤을 출 마음은 없었는데. 그런 내 마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아우릭은 내 몸을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시작한다-! 라는 말과 함께 창백한 달빛이 그려 넣은 선을 따라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거 몰라. 아직 풀리지 않은 몸의 긴장 때문에 몇 번이고 발이 허공에서 헛돌았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춤을 출 수 있었다. 그가, 업무라 하면 뺀질거리며 도망 다니기 바쁜 그가, 재미있는 일을 찾는 데에만 열을 올리는 그가, 리드해주고 있었으니까. 내가 넘어질 것 같으면 허리를 받친 손에 살짝 힘을 주고 내 뻣뻣한 몸을 끌어 올렸고, 내가 박자를 타지 못 하는 것 같으면 재치 있게 스텝을 바꿔 편안하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해줬다. 역시. 무서운 남자야. 긴장이 조금 풀린 나에게 아우릭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대뜸 물었다.

그래서. 우리 별지기는 어디에서 왔다고? 수도의 외곽? 어디?

네......?

그렇잖아. 수도 외곽에서 왔다며. 퍼디에게 물어봐도 말해 주지 않는걸. 어때? 외곽은 재미있어?

하......하......

아. 빈틈을 보였다. 어떡하지. 유난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만 골라서 하는 그 때문에 다시 리듬이 헛돌기 시작했다. 그는 몸치인 나를 유연하게 리드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했다. 어떻게 대별지기를 알게 되었는지, 신전에서 받아야 하는 교육은 어떻게 된 것인지, 무슨 일을 하다 왔는지 같은 것들을. 엔지. 간절하게 엔지가 보고 싶었지만, 알고 있다. 엔지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 이 상황을 즐기고 있을 거라고. 내가 그의 질문에 어떤 답도 제대로 하지 못 하고 어설프게 둘러대는 것을 지켜보던 그가 대뜸 춤을 멈췄다. 달 위로 엷은 구름이 천천히 흘렀다. 그가 덮어준 단장 코트 위로 라스 알게티의 빛이 천천히 떨어졌다.

우리 별지기는 사람을 믿어?

네?

주황빛의 시선이 내 눈에 그대로 날아왔다. 그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우리 별지기님은 사람을 너무 잘 믿는 거 같아서. 그래서 말인데.

구름이 천천히 물러갔다. 어디에도 그림자가 생기지 않을 것처럼 밝은 달빛이 생활관 옥상에 가득하게 비춰왔다. 그는 몸을 조금 숙이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나를 믿어?

그것은, 비웃음이 섞인 말이었다. 비릿한 웃음. 잠시 숨을 참았다. 나는 말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맞잡은 손에 힘을 살짝 주었기 때문에 손을 뺄 수가 없었다. 그의 까만 가죽 장갑 너머로 건너오는 불에 데일듯한 온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 주황빛의 시선에서 달아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가 매일같이 심던 것은 무엇일까. 꽃? 희망? 꿈? 그렇지 않다면?

이 옥상 위에는 꽃도, 희망도, 꿈도, 그럴 법한 로망스도 없다. 지독하고 창백한 이름 없는 달빛과 딱 그만큼의 광기만이 남은 새벽. 그리고, 주황색의 눈. 그 눈으로 가득한 허공.

나는 도망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