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먹을 꼭 쥐었다 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내가 내 손을 가만히 본 적이 있었던가. 곧 이어 마른기침을 했다. 몸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닳아 내리는 몸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에게는 그게 나이가 든다는 의미였다.
새해가 된다고 변하는 건 없었다. 언제나처럼 대원들은 해야 할 일을 했고, 대장인 그도 일로 바빴으니까. 어쩌다 잠시 짬이 날 때면 습관처럼 먼 곳을 보거나 나무 조각을 만지는 게 전부였다. 생일마저 기억하지 못 하는 그였다. 새해를 챙기는 데에 유난이던 때도 있었지만 지나간 시간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삶은 특별한 이벤트로 가득 차 있다고 믿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던가. 남자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건조하고 딱딱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에 어리둥절할 때가 있었다. 오늘이 그랬다. 왜 이렇게 됐을까. 하지만 남자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런 삶을 걸어온 데에는 별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을. 그냥 그건, 그렇게 된 일이었다.
대장님!
색깔 없는 꿈에서 깨어나듯 남자는 문을 향해 돌아보았다. 붉은 빛으로 반짝이는 두 눈이 그대로 남자에게 날아와 박혔다.
여기 계셨어요? 뭐 하고 계세요?
그냥, 뭐.
남자는 머쓱하게 웃으며 주먹을 쥐었던 손으로 뒷목을 쓸어내렸다. 아직 깨지 못한 꿈을 들킨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웠다.
괜찮으시다면, 나오실래요? 대원들이 먹을 것을 좀 만들었어요.
음? 먹을 거?
네. 새해잖아요.
앳된 얼굴의 붉은 눈을 가진 소년은 밝게 웃었다. 그늘 하나 없는 웃음. 그러나 남자는 소년 같은 그가 혼자 많은 시간을 참아온 사람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기에 마음이 아팠다. 저 녀석도 나이가 들었나. 언뜻 보이던 얼굴의 그늘을 조금 더 잘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차분해졌나. 차라리 투정을 부리면 좋을 텐데. 남자는 앉아 있는 그대로 애써 웃으며 말했다.
응. 조금 있다 나가지. 요리라면, 너가 고생 많이 했겠네?
아뇨. 다들 도와줘서 금방 끝냈어요.
뭐, 어쨌든 고생했다.
얼른 오세요!
그래.
남자는 알고 있었다. 저 녀석은 투정 같은 거 부리지 않아. 자신의 짐이라고 믿을 테니까. 괜히 주먹을 꼭 쥐었다 폈다. 자기 몫의 짐은 따로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혼자 괴로워하는 걸 지켜보는 것보다 힘든 일은 없었다. 하지만 금방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힘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익숙해져야 하는데. 얼굴을 쓸어내렸다. 서걱거리는 이물감 때문에 손을 금방 얼굴에서 떼었다. 나가야지.
몸을 일으키자 창밖으로 시리도록 밝은 별들이 보였다. 얼마간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남자는 별을 오래도록 보는 때가 종종 있었다. 에테르 때문에 별빛을 받아야 할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별빛 아래에 앉아 별을 보는 때가 있었다. 어디서부터 날아와 이 하늘에 박혀 빛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저 아득한 빛을.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흉터 자국으로 성하지 않은 몸이 걸어온 시간. 그런 건 저 빛에 비하면 금방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마에 있는 흉터 자국을 손가락 끝으로 쓸었다.
나도 나이가 들었나.
잠시 중얼거리던 그는 빛 없는 방의 끝으로 향했다. 방문 너머에 자신을 기다리는 대원들이 있으니까.
그러나 그 방에는 여전히 별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스스로를 깎고 남은 자신의 모습이 아무리 초라하더라도 그는 어느 누구도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초라하기 때문에, 더욱, 이름 없는 이들의 손을 잡을 거라고. 그는 나이가 들고 있었다. 그 고집을 도저히 버리지 못 할 정도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방에는 여전히 별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그는 그게 나이가 든다는 의미라는 걸 아직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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