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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톡

[소원권][진공대] 멀리 돌아오는 내일

by ___hashi___ 2020. 5. 15.

 

https://www.youtube.com/watch?v=E244Db-Cd5I

활짝 피어있어야 할 붉은 장미는 거의 다 시들어 말라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남자는 건조한 눈을 비비고 안경에 묻은 먼지를 닦아냈다. 군사들에게 선물 받았지만 화병에 꽂혀 있는 장미는 성가시기만 했다. 가끔 물을 갈아줘야 했고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둬야 했다. 하지만 남자는 꽃에 신경을 쓰기에는 머릿속이 너무 바빴다. 목표로 하는 일이 있었고 그러나 잘 될 것 같지 않아 초조했다. 말라비틀어진 담배를 하나 꺼내 라이터를 켰다. 붙지 않는 불을 몇 번 댕긴 끝에 겨우 한 모금 피웠다. 고요한 침묵으로 질식할 것 같은 방 안. 갑갑했지만 구태여 커튼은 열지 않았다. 빛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마른 목을 타고 흘러내린 담배 연기에 잠깐 헛기침을 했다. 담배 연기를 삼킨 적은 별로 없는데. 세 번째 주군을 맞이한 남자는 머리가 많이 세었고 수염 정리도 잘하지 않았다. 구두는 항상 꺾어 신었고 바지 밑단은 헤져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알지 못했다. 나이도 들었고 신경도 많이 썼으니 몸이 좀 상했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를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예전과 많이 달라진 그의 모습에 당황할 것이다. 총기가 어린 눈은 아직 그대로였지만 그건 총기라기보다는 이상을 향한 맹목적인 광기에 가까웠다. 이 남자에게는 지금의 주군도 도구 이상의 가치로 보이지는 않았다.

남자는 담배를 피우다 말고 하얀 커튼 너머에서 엷게 밀려오는 창백한 빛을 알아보았다. 침대 맡에 앉아서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그는 길게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살폈다. 남자는 문득 자신의 시야가 너무 좁아진 게 아닐까 싶어 덜컥 겁이 났다. 봐야하는 걸 보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말라버린 장미를 향해 다가갔다. 시든 꽃대를 들자, 입구가 넓은 화병에서 고약한 냄새가 났다. 오래도록 방치해뒀으니 어쩔 수 없었다. 거기다 검붉은 빛으로 시든 꽃 위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남자는 잠깐 눈을 찡그리고 꽃을 책상 위에 던져뒀다. 책상 옆에는 이제는 쓸모없어진 책과 서류들이 가득 쌓여 있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화병을 들고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었다. 새벽이었다. 동이 트기 직전인 하늘에는 하얀 온기가 어려 있었다. 남자는 잠깐 몸을 떨었고 곧 창문을 열고 화병 안의 물을 창밖에 쏟아 버렸다.

‘그 때 죽였여야 했는데.’

남자는 첫 주군을 죽이지 못한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 붙이려 하지 않는 자기 자신이 너무도 지겨웠다.

‘차라리 한 놈 밑에서 꾸준히 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피곤하지도 않고.’

그러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쓸데없이 높은 이상 때문에 그럴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남자는 시든 장미를 들고 쓰레기통에 다가갔다. 그러다 문득 떠올렸다. 딸이 꽃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는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얼굴 본 지도 너무 오래되어서 이젠 딸의 목소리도 가물가물했다. 좋은 신하, 좋은 아들,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그는 그 무엇 하나도 해낸 게 없었다. 남자는 시든 장미를 꼭 쥔 손을 잠깐 떨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장미꽃을 쥔 손이 따끔했다. 손을 펴자, 가시에 찔린 손바닥에서 핏방울이 올라왔다.

‘어쩌다...’

뜻하지 않게 눈이 아려온 그는 갑자기 느껴지는 낯선 감각에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손 위에 떨어진 것은 남자의 눈물방울. 나이가 들었고 더 이상 물러날 데 없던 그는 오랜만에 눈물을 흘렸다. 조용히. 숨을 죽이며.

힘 빠진 어깨를 늘어뜨리고 책상 위에 꽃을 올려놓았다. 다시. 말라버린 꽃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는 몰랐으나 도저히 꽃을 버릴 수 없었던 그는 얼굴에 흐른 눈물을 닦아냈다. 빨갛게 부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열려 있는 창문으로 찬바람이 불었다. 커튼이 한 번 붕 떠올랐고, 호를 그리며 내려앉았고, 시린 새벽의 빛이 방안에 밀려 들어왔다. 결국 오고야 만 것이다. 오지 않길 바랐던, 내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