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더워...
체격 좋은 남자는 헉헉 소리를 내며 열심히 구릉 위를 올랐다. 쓰고 있는 모자는 여름용이었지만 남자와 같이 더위를 느끼기 시작한 모자의 토끼는 결국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납게 내리꽂는 볕을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의미 있는 일은 아니었다. 큰 포상이 따르는 일도 아니었고 그의 명예를 높여주지도 않았다. 그래도 장문원은 하겠다고 말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냥 구릉 위에 가득 피어 있는 해바라기 좀 꺾어 달라는 일을 못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이상할 정도로 어린애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장문원은 그런 이유 때문에 머리에 쓴 토끼 모자와 함께 헉헉대며 구릉 위를 오르고 있던 것이다. 단지, 해바라기를 꺾기 위해서. 애가 부탁했으니까.
구릉 끝까지 다 오르자 보이는 것은 넓은 들판에 가득 피어 있는 해바라기. 노란 꽃잎은 타오르듯 하늘을 향해 반짝 고개를 들고 있었다. 자신의 큰 키만한 해바라기를 둘러보던 장문원은 어디서부터 꺾을지 잠깐 고민했다. 가장 가까운 곳의 꽃을 꺾을까? 부탁받은 아이에게는 미안했지만, 멀리 가기는 귀찮았다. 힘들기도 했고. 장문원은 어깨를 축 늘여 트리고 더위를 식혔다. 해바라기 밑에 얕게 드리워진 그늘 아래에서 잠깐 눈을 감았다. 자신의 어리숙함을 탓하면서.
그래서 이렇게 되었나 하는 회의감과 함께.
‘아. 또 쓸데없는 생각을.’
고개를 저은 장문원은 얼른 주머니에서 가위를 꺼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해바라기 줄기를 하나 꺾었다. 잠깐 옛 주군 생각을 했다. 짐승처럼 사납고 모두가 두려움에 떨던 그 남자를. 그러나 지나간 사람이었고 장문원은 가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남자가 과거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사실 장문원은 그가 천하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토대가 없던 그들이 거대한 업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죽지 않고 잘 버티면서 세력을 조금씩만 넓히면 되는 거였는데. 옛 주군은 죽어버렸고 그는 새로운 주군 밑에 있었다. 감히 천하를 꿈꾸는 사람 밑에.
바라는 건 없었다. 지금의 주군은 그에게 이미 많은 것을 줬으니까. 그런데도 가끔 지금처럼 과거를 떠올릴 때가 있었다. 옛 주군과 함께 먼 길을 걸어온 시간을. 조조를 배신한 진선생은 그런 말을 했었다. 자신의 손으로 끝내야 하는 일은 반드시 끝마쳐야 한다고. 진선생은 조조의 손에 죽었다.
몇 개의 큰 해바라기를 꺾은 장문원은 꽃대를 옆구리에 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건, 맑은 하늘과 머리 위에 피어있는 커다란 꽃, 그리고 줄기 사이로 비치는 햇빛. 갑자기 금이 생각이 났다. 과거 주군이었던 남자의 딸.
‘얼른 내려가야지.’
장문원은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았다. 흙냄새가 올라오는 땅을 얼른 뛰어 내려가던 장문원은 과거를 그 먼 시간속에 두고 와야 한다고 되새겼다. 과거를 두고 이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진쌤. 그래서 돌아가신 거라니까. 하여간, 쌤도 집착이 너무 심했어요.’
입가에 도는 엷은 미소는 그리움 때문이었지만 곧 고개를 들고 앞을 봤다. 어린아이가 기다리고 있었고, 아이 근처에는 지금의 주군이 툴툴대는 중이었다. 그가 살아야 하는 지금과 미래는 이 자리에 있었다. 과거를 두고 나오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살아야 했다. 악착같이.
“꼬맹이, 기다렸음? 죄송! 여기! 가득 가져왔는데 가져갈 수 있겠냐?”
장문원은 익숙한 함박웃음을 지었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모자의 토끼도 웃고 있었다. 다시 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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