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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톡

[소원권][조자렴] Clair De Lune

by ___hashi___ 2020. 5. 17.

 

https://www.youtube.com/watch?v=NTfeMhyyy5o&list=RDVdXuDK2mPBY&index=2

창백한 달빛이 지금 막 혼자 살아남은 남자의 얼굴을 비췄다. 적은 많았고 그러나 남자는 생각보다 강했다. 얄쌍한 몸매와 매력적인 외모. 거기다 부자이기까지 한 그를 두고 사람들은 그런 이가 칼을 잡는 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제 몫을 충분히 해내는 장수였다. 소문난 부자답게 배포가 크고 사람 보는 안목이 높았으며 쉽게 물러나지 않았고 치밀했다. 피가 고인 웅덩이에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매끄럽고 하얀 얼굴에는 검붉은 피가 몇 방울 묻어 있었고 꼼꼼한 남자는 돈 계산을 할 때처럼 핏자국을 조심스레 닦아냈다.

으, 이런. 나 같은 미남이 이런 꼴로 있어서는 안 되겠지? 흥. 우리 브라더는 어디 있니? 이 예쁜 동생 안 챙기고?

우는 소리를 내며 그렇게 말했지만 남자는 그가 따르는 주군이자 사촌 형이 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더 정확히는 오지 않기를 바랐다. 꿈이 크고 그 탐욕스러운 남자가 뒤를 돌아본다고? 남자는 비릿하게 웃으며 선글라스를 벗고 중얼거렸다.

그런. 그럴 리가 없지. 그렇지, 브라더?

주머니에서 안경닦이를 꺼내 때 묻은 선글라스를 닦아냈다. 이제 사촌형을 찾아가면 되었지만 남자는 잠깐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약. 정말 오랜만에 본, 작약이었다. 그것도 보기 드문 하얀 작약이 쓰러진 적의 무리 옆에 가득 피어있었다. 적의 피를 묻힌 작약은 달빛 아래에서 조용히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남자는 선글라스를 잠깐 주머니에 넣고 작약을 둘러보았다. 역시, 뭔가 아쉬웠다. 그는 고민 않고 피가 묻어있는 작약 줄기를 골라 꺾기 시작했다. 꽃대는 생각보다 두꺼웠고 그러나 남자는 고집을 부리며 결국 몇 송이를 꺾었다. 피 묻은 꽃을 잠깐 보던 남자는 빙긋 웃으며 미련 없이 꽃을 내던져버렸다.

이런 건 필요 없잖니? 하얀 꽃은 하얗게 피어있어야지.

웅덩이에 버려진 하얀 꽃잎은 천천히 피로 붉게 물이 들었다. 배포가 큰 남자는 가득 피어 있는 꽃을 보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사람이 오지 않는 일대라고 알고 있었는데, 잡초 없이 꽃이 가득 피어있다는 건 누군가가 가꾼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누가 찾아온단 말인가. 이렇게 버려진 곳을 구태여.

감상적인 일을 하는구나? 투자할 만한 땅에 투자를 해야지. 뭐 어쨌든, 누군지는 몰라도 기특하네? 보이지 않는 곳에 꽃을 키워 놓고?

그 말을 뱉은 남자는 잠깐 말을 멈췄다. 보이지 않는 곳에 키웠다. 그러자 알 것 같았다. 왜 이 버려진 땅에서 꽃을 가꿨는지. 척박한 땅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나기를 바랐던 누군가의 마음이었을 거라는 생각. 그러나 그건 남자의 방식과는 아주 멀었다. 남자는 잠깐 코웃음을 쳤다. 주머니에 넣어둔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넓은 들판을 둘러보았다. 하얀 작약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광야를. 하얀 꽃을 모두 베어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꽃은 땅에서 자라야 하는 법. 대신 남자는 쿨하게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사면 되지, 이 땅. 그런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몰랐니? 고집을 부려볼까? 가장 빛나는 땅으로 만들어주지. 돈을 가득 들이고,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널리 소문을 내고...

남자는 가볍게 돌아섰다. 합류해야 할 때였다. 그건 남자의 방식이었다. 배포가 크고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남자의 방식.

진한 작약 향이 남자의 코끝을 찔렀다. 서늘하게 빛나는 달 아래에서 흩어진 작약 꽃잎을 밟던 남자는 가볍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한들한들한 바람이 불자 작약 꽃대가 소리 없이 물결쳤다. 자부심이 높은 충정. 그 만의 방식으로 또 다른 애정을 쏟아야 할 때였다. 그의 주군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