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불을 걷자 어깨를 감싸고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에 살짝 몸을 움츠렸다. 요즘은 일어날 때마다 몸이 가뿐하지 않다. 왜 그러지. 카페 사장님이 지나가듯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나인, 자네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해! 요즘 자네 같은 친구 구하기가 정말 힘든데 말이야. 그러니까, 열심히 일해서 몸이 피곤한 거라고? 침대에 앉은 채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음. 그건 아닌 것 같다. 다른 곳에서 일할 때도 이만큼 했는걸. 그냥, 몸이 좀 피곤한가? 그렇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이불 위에 올려놓은 손에 잠시 주먹을 쥐었다. 괜히 예민한 거야. 설핏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배게 옆에 엎어 두었던 핸드폰을 뒤집었다. 벌써 아홉 시를 넘은 시간. 출근까지 아직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음. 졸린데. 포근한 이불이 나를 부르며 손짓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대로 누워 있고 싶다. 조금 더 뒤척이다 출근하고 싶다. 하지만 계속 게으르게 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금방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간단히 씻은 다음 차를 끓이러 부엌으로 향했다.
싼 값에 구한 자취방. 층이 높지 않고 변두리 길가에 있는 멘션이라 원룸이 세련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괜찮아. 언제까지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앞으로 두 달, 아니 한 달, 아니... 카페에서 일한 지는 네 달쯤 된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래 있었다. 포트에 뜨거운 물을 담고 스위치를 눌렀다.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으니까 페퍼민트를 마실까. 잠시 멍한 얼굴로 서 있다 눈을 비비고 침대 옆에 난 작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무겁게 깔려 있는 구름 사이사이로 흐린 빛이 드물게 떨어졌다. 이렇게 하늘이 낮은 걸 보면 눈이 내리려나 보다. 머그컵에 티백을 담그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얼마나 더 오래 있을 수 있을까.
가볍게 왼쪽 어깨를 주무르며 일하고 있는 카페를 생각했다. 알바처럼 하는 일이니까, 돈을 많이 벌지는 못 하지. 하지만 여기에 정착하고 사장님께 말씀드리면 정식 직원으로 채용될 수도 있어. 나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눈치니까. 그렇다면 나도 여기서......
우아하고 아름다운 눈. 차가운 듯 따뜻한 미소.
한 모금 들이킨 차가 너무 뜨거워 얼른 컵을 떨어뜨려놓았다. 아. 혀가 데었다. 갑자기 생각난 그 사람 때문에 놀란 것 같아.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남자였다. 사슴처럼 우아한 눈매. 그 눈매는 잊은듯하면 어김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 요즘 왜 이러지. 차를 개수대에 쏟아 버리고 손을 씻었다. 눈을 들어 다시 창밖을 보자, 세상은 고요. 구름 사이로 내리는 눈송이들.
내일. 언제부턴가 내일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말했다. 내일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떠올릴 수 있는 옛날 일은 항상 행복이라는 정경에서 비껴간 것들이었다. 친구가 억울하게 누명을 썼지만 학생이었던 나는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거리에서 맞는 사람을 봤다. 가난 때문에 밥을 굶던 후배가 있었다. 왕따를 당하던 아이가 있었다.
언제나 그들을 위해 애를 썼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먼저 손을 잡아주고 싶었는데, 결국 그들로부터 떠나야 했다. 내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 같아 그들 곁에 남아있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항상 다시 시작했다.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장소에서. 과거로부터 도망치듯. 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다시 힘을 내서, 다시, 다시...
추억할 수 있는 과거는 흐릿한 잔영이 되어 유령처럼 떠돌았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꿈꾸기를 조금씩 포기하기 시작했다.
나인! 계산 좀 해줄래?
네! 잠시만요-.
마감까지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카페를 찾아주시는 손님들이 많아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카페 창을 통해 보이는 것은 물결마저 고요히 잠든 강. 손님들은 겨울의 밤 시간이 되어도 카페 옆으로 난 테라스에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 오늘은 강바람마저 불지 않는다. 하루종일 소리 없이 내리던 눈송이가 단단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밖을 좀 쓸어야겠어. 손님들은 저마다 카페라테, 아메리카노, 초코 라테를 마시며 단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손님들을 둘러보다 계산을 마치면 음료를 만들었고, 빈 테이블을 정리하다가 컵을 씻었다.
씻은 컵을 리넨 천으로 닦고 머신에 올려놓는데 문득 생각났다는 얼굴로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아, 나인. 맞아. 나 카페 정리해야 할지도 몰라.
네?
생각지도 못 했던 말 때문에 놀라 사장님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여기저기에 주름이 패어 있는 사장님의 얼굴에는 낮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더 일찍 말했어야 하는데, 미안하구나. 카페가 잘 되니까, 건물 주인이 직접 운영하고 싶은가봐. 집기도 정리할 시간을 안 줄 것 같아.
그건, 너무 부당하지 않나요, 사장님?
어쩌겠니.
순간, 팽그르르 도는 머리 때문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사장님은 머신 청소를 시작하며 말씀하셨다.
오늘은 손님 그만 받자. 마감해야지?
네.
사장님은 나를 보며 웃고 있었지만, 그건, 웃는 얼굴은 아니었다. 나도 웃을 줄 알아. 저렇게. 웃지 않는 웃음. 이제 어떡하지. 뭐 어차피 오래 있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또다시 어디론가 가야 하는구나. 여기에도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내 자리는 없었다. 잠시 숨을 참고 포스기 정산을 시작했다. 매일 하던 동작을 그대로 되풀이하면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사장님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내일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당신도 그래요.
그건, 거짓말이야.
딸랑.
아. 죄송합니다, 손-......님?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그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깨에 가득 내린 눈을 털면서. 까만 코트에 붙은 하얀 눈은 차분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슴 같은 우아한 눈.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천연스러운 얼굴로 나를 향해 다가왔다. 생각하지 못했던 반가운 손님 때문에 괜히 놀라 허둥지둥 댔다. 아침에 혀를 데었던 그 느낌. 이번에는 뜻 모를 반가움에 가슴이 덴 것 같다. 하지만 좀 아쉽다. 오늘은 그냥 보내야 하니까. 그럼, 그냥 보내지 않으면 뭐. 어쩌...려고...? 나도 모르겠는 나의 머릿속 때문에 뒷목이 화끈거렸다.
그...... 이제 마감이라......서요!
-네.
그래서, 그... 죄송합니다! 내일 와 주시면-
...네?
네?
죄송하지만, 언제 끝나죠?
아. 열한 시면 문을 닫거든요.
네. 그러면 열한 시까지 기다리면 될까요? 삼십 분 남았군요.
......네?
사장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어쩐지 들키면 안 되는 혼자만의 비밀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 비밀이 뭔지는 나도 모른다. 어떡하지. 그나저나 이 사람, 생각보다 고집이 세고, 그...... 눈치가 좀......없...구나! 나는 괜히 밝게 웃으면서 포스기를 바라보았다. 도저히, 저 눈을 못 보겠어. 왜 저렇게 고집 있는 얼굴로 보는 거야.
갑자기 이렇게 부탁드려 죄송합니다만, 끝나고 잠깐 시간을 내어줄 수 있나요? 차에서 기다릴게요. 차로 오세요.
예? 갑자기요...?
네. 제가 생각해도 너무 무례했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잠깐이면 돼요.
이렇게까지 고집이 세다고? 눈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자, 대충 얼버무리지도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의라고는 없는 단아한 눈. 단정하게 반짝이는 금발. 웃고 있었다.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내 눈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걷지 않는 길만을 얄팍하게 걸어온 내 시간을, 그대로 들여다봐 줄 수 있는 눈. 그래서, 마음이 약해지는 미소. 그 남자의 눈을 보는 영원 같은 찰나 속에서 떠오르는 예감. 오늘은, 집에 늦게 들어가야 할 것 같아. 뻔히 알고 있는데도, 희망은 잡기만 하면 뒤통수를 보기 좋게 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다시 잡고 싶은 것이 생긴 것 같았다. 내일. 당신이 말해준, 내일을 잡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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