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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100분전력]Spiegel im Spiegel

by ___hashi___ 2020. 7. 18.

https://www.youtube.com/watch?v=TJ6Mzvh3XCc

- 새하얀 거짓말

- 별빛을 싣고 달리는 기차

- 아쉬운 마음을 감추고는

 

음악을 재생해주세요


 

 

선잠을 자던 여자는 갑자기 덜컹거리는 소리에 놀라 얼른 눈을 떴다. 기차 안에 자기 혼자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잠깐 당황했지만 아까 잠깐 만났던 여자의 말을 떠올리자 곧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 기차에는 당신만 타고 있으니 놀라지 말아요. 나는 잠깐 안내를 하러 왔을 뿐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다시 책을 향해 눈을 내리깔았다. 어깨가 작았던 그녀. 햐안 비단 원피스를 입고 앉아서 한가롭게 책을 읽던 그녀. 읽던 책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 끝이 희미했다. 노트에 누군가 손으로 끼적인 글자가 가득했고 아마도 본인의 수첩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기차에 혼자 남겨진 여자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내가 이 기차의 주인인 거지. 지금은. 그 여자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여자는 혼자 되뇌고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기차 밖에서 춤추는 별무리가 몇 번 창문을 때렸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상했다. 비단 원피스를 입고 있던 그녀의 말이 옳았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잠을 이겨내지 못한 그녀는 결국 다시 고개를 숙이고 졸기 시작했다. 별무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창밖의 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덜컹.

언니. 일어나요.

어느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여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원목으로 덧댄 기차 바닥은 기름칠을 해 반질반질했고 붉은 벨벳으로 천을 덧댄 좌석은 두 명씩 마주 앉을 수 있게 배치해놓았다. 두 명이 앉으면 전부인 그 작은 칸은 바닥에 덧댄 나무와 같은 재질로 문을 만들어 가려놓았고 작은 창문이 뚫려 있어 기차 복도를 내다볼 수 있었다. 작은 창문에는 짙은 주홍색의 공단 커튼이 내려와 있었다. 쇠 이음새마다, 좌석 객실의 손잡이마다, 창틀마다 금칠을 해 놓았으나 몇 군데는 칠이 벗겨져 있었고 여자는 자신이 타고 가는 기차의 모습을 이제야 자세히 보고 있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끼며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어린 여자아이. 똘똘하게 생긴 여자아이. 어쩐지 아까 그 안내인이랑 닮은 것도 같고? 아이는 붉은 벨벳의 좌석에 몸을 파묻고 앉아 불안한 눈을 끊임없이 여기저기에 굴리고 있었다. 여자는 아직 잠이 깨지 않은 채로 의아함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가 알고 있기에는 이 기차에는 자기 혼자만 타고 있었다. 안내자를 제외한다면. 그러나 전혀 모르는 어린아이가 타고 있지 않은가?

어... 누... 누구니? 미안. 언니가 자다 일어나서.

음. 네. 괜찮아요. 저는 여섯 살이에요. 유치원 선생님들은 저를 많이 칭찬해주세요. 말을 잘 들어서요.

응. 그렇구나.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던 언니가 알려줬어요. 여기에 오면 집에 갈 수 있대요.

응... 응? 아니, 아니지 않아? 이 기차는 종착역이 없다고...

어린 아이는 바지런한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마주 앉은 그녀를 째려보았다.

종착역이 뭐에요?

그건, 마치 유치원 선생님들이 그토록 칭찬하는 자신이 모르는 단어는 있을 리가 없으며 있을 수도 없고 그러니 그런 단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전형적인 아이다운 태도였으며 마주 앉은 그녀는 종착역이라는 단어가 정말 존재한다고 해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럴 필요 없이 말을 너무 많이 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야. 정말, 종착역이 없는 기차랬어. 자, 잠깐 알았어, 설명해줄게. 종착역은 말이지, 기차가 마지막에 서는 곳이야. 그, 기차는 원래 ‘역’이라는 곳에서 서잖아, 그렇지? 거기서 사람을 태우고 또 다른 역에 내려주고 그러는 거야. 그러려면 마지막에 도착하는 곳이 있어야 하잖아, 그렇지? 그런데 이 기차는 역이 없고, 종착역도 없고, 그런 기차랬어. 나도 잠깐 졸다가 눈을 떴을 때 이 기차에 타고 있었는걸. 역이 없는 건 사실이야, 그런데... 너 그 언니 언제 봤어? 안내자.

몰라요. 언니 말은 다 이상해요. 졸다가 기차에 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자, 잠깐. 그 여자 어떻게 내렸지? 이상하잖아. 분명 내 앞에 있었는데. 아니면 다른 칸에 있나. 그리고, 나 혼자만 기차에 타고 있다고... 나... 나는 어떻게 탔지?

언니. 저도 있잖아요. 언니 혼자만 기차에 있는 게 아니라고요.

그 말에 말문이 막힌 여자는 결국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유치원 선생님들이 예뻐한다더니 정말, 똑똑하구나. 알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니었지만. 여자는 싸늘한 바람 때문에 몸을 떨었다. 기차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여자는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를 대충 고무줄로 묶고 얼른 창문을 닫았다. 밤바람이 찼다. 아이도 추운지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마주 앉은 두 좌석 사이에는 긴 원목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금빛으로 수가 놓여 있는 아름다운 테이블보 위에는 짙은 녹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전화기와 작은 안내서가 붙어 있는 나무판이 놓여 있었다. 안내서에 쓰여 있는 내용을 읽기 위해 몸을 굽히자 아이가 흠칫 뒤로 물러났다. 똑똑하지만 겁도 많구나.

 

어서 오십시오.

이 기차는 한 명만 탈 수 있으며 안내자가 항시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음료와 숙식을 제공할 수 있으며 이 밖에 필요한 것 모두 안내자의 도움을 통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안내자가 필요하시다면 좌석 테이블에 놓여 있는 전화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원하신다면 기차 안을 마음대로 둘러보셔도 좋습니다.

이 기차에는 한 명의 동행인만 같이 탑승할 수 있으며 동행인을 지정하지 않으시는 경우 안내자가 동행인을 지정할 수 있습니다.

편안한 여정 되십시오.

 

그... 그렇구나. 내가 놓친 게 있나 봐...

네? 뭐라고요? 언니. 밖에 나가도 되는 거예요?

그렇대. 음. 배 안 고프니? 좀 둘러보고 와서 뭐 좀 먹을래?

음... 네. 밖이 궁금해요.

나도 그래. 가보자.

여자는 닫혀 있는 문 손잡이를 움켜쥐고 살짝 밖을 내다보았다. 놀라운 풍경이 펼쳐져 있는 건 아니었으므로 여자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여자가 앉아 있던 칸의 한쪽 옆으로는 긴 복도가 있었고 복도 양 옆으로 객실 칸이 있었다. 다른 한쪽 옆은 벽이었다. 여자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좌석의 빈자리와 친절한 듯 불친절한 안내서, 의문스러운 전화기와 호기심에 달뜬 얼굴을 하고 있는 똘똘한 여자아이.

여자는 복도로 나섰다.

아이와 맞잡은 손은 건조했고 복도 바닥을 비추고 있는 노란 등불 때문에 마음이 태평스러웠다. 걱정할 일이 뭐가 있어. 그럴 일은 하나도 없어. 여자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에게 물었다.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니?

음... 부모님이 보고 싶긴 한데요, 옆 칸에는 누가 타고 있을까요?

안내서에는 안내자만 있다고 쓰여 있었어. 근데 나도 궁금하니까.. 한 번만 볼까?

여자는 옆 객실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키가 작은 아이는 문 앞에서 대놓고 폴짝폴짝 뛰었지만 아이를 말릴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었다. 아무리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하라고 부탁을 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는 아이는 입을 비죽 내밀고 여자에게 말했다.

뭐야. 언니 봤어요? 난 방금 뛰면서 본 건데, 안에 아무도 없어요.

어? 정말? 뭐, 안내서 말대로 되어 있나 봐. 정말 우리만 있나 봐.

그렇게 말한 여자는 커튼 사이의 틈새로 살짝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그 안에는

어두운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뭐, 뭐야. 너 정말 아무것도 못 봤니?

... 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맑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여자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렇게 작은 아이가 이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아주 작은 틈으로만 보이니까. 여자는 잠깐 망설였다. 이상했다. 그 문 너머에 있는 것은 객실이 아니었다. 새벽빛이 겨우 비춰 들어오는 서늘한 방 안이었고 그 안에 있는 것은 이름 모를 처음 보는 여자였으며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있었다거나 하는 연극적인 모습은 전혀 없었지만 텅 빈 얼굴로 허공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안내자에게 전화를 거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애초에 이 기차가 무슨 기차인지 몰랐으므로 불안하기도 했다. 왜 저 너머에 있는 것은 객실이 아니란 말인가?

언니. 뭔데요.

자, 잠깐, 아니, 너는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가볼게.

여자는 용기를 내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답답한 방의 공기 때문에 숨이 막혔다. 눈을 찌푸린 여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앉아 있는 여자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여자는 기운이 없어 보이는 그녀를 돕는 게 먼저라는 생각에 얼른 뛰어 들어갔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괜찮아요? 일어나요, 밖으로 나와서 뭐라도...

앉아 있던 여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일으키려 해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미동이 없었다. 이상했다. 이 모든 게 이상했다. 객실 안에 있는 게 전혀 알 수 없는 공간이라는 점도 이상했고 안내자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도 이상했다. 여자는 먹을 것을 찾아 먹는 게 먼저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다른 객실 칸도 둘러봐야 했다.

언니, 괜찮아요? 뭐 해요? 아니, 왜 혼자 이상한 말을 해요?

혼, 혼자?

네.

객실 밖에 선 아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찌푸리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니까, 이 모든 광경은 그녀만 볼 수 있고 그녀만 느낄 수 있다는 말과 다름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안내자도 자신을 도울 수 없을지 모른다. 여자는 갑자기 밀려드는 막중한 책임감 때문에 주저앉은 여자에게 외쳤다.

다른 칸도 보고 올게요! 당신, 이상한 생각 하면 안 돼요!

무슨 말이에요, 언니? 빨리, 부모님한테 데려가 주세요.

뭐...?

안내자가 그랬단 말이에요. 그 사람이, 언니가 저를 부모님한테 데려다 줄 거라고... 여기 칸 어디에 있을 거라는데... 언니 빨리요, 저 얼른 가고 싶어요.

이, 이게... 무슨...

머리가 아득해진 여자는 잠깐 일어선 채로 비틀대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러니까, 안내자도 이 상황을 아주 모르는 건 아니라는 말이지? 객실마다 뭔가 있다는 말이잖아. 어느 객실에 이 아이의 부모님이 있다는... 하지만 나만 알 수 있는... 잠깐 허둥대던 여자는 얼른 그 공허한 방을 뛰어 나가 다음 객실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젊은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바이올린이 제 뜻대로 켜지지 않는지 여자의 표정은 좋지 않았고 악보 너머의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은 깐깐한 얼굴의 교수가 몇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의실이었는지 줄지어 늘어서 있는 의자와 책상이 보였고 떨리는 현은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의 몇 가닥을 연주하다 곧 그쳤다.

안 되겠는데.

교수의 말에 젊은 여자는 눈에 띄게 주눅이 든 모습을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여자는 은근히 화가 났다. 조금 부족한 실력일지 모르지만 격려라도 해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연주를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언니.

아, 맞다. 으, 응. 그, 저, 저기요! 칭찬을 좀 해주세요! 더 잘할 수 있다고요!

그러나 여교수와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음대생은 전혀 들리지 않는지 자기들만의 말로 빠져들었다. 여자는 고개를 젓고 몇 칸을 건너뛰었다.

그래! 이렇게 하자, 알았지? 언니가 얼른 부모님한테 데려다줄게! 그리고 말이지, 부모님한테 아까 그 여자를 도와달라고 해도 될까? 나 혼자는 무리 같아!

네? 아, 언니 뭔 말을 하는 거예요? 하. 알았어요. 어쨌든, 그렇게 해요! 얼른 부모님한테 데려다주세요!

알았어, 잠깐만.

끝도 없이 이어지는 몇 개의 문들을 벌컥벌컥 열을 때마다 여자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객실 안에는 어린아이의 부모가 아니라 교복을 입고 음대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들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소녀, 부모님 몰래 바이올린을 집에서 연주하다 들켜서 혼나는 소녀, 학교 음악 시간에 바이올린을 뛰어나게 잘 켜는 친구를 보고 주눅이 든 더 어린 소녀... 여자는 어느 순간 우두커니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나는 여덟 살 소녀의 모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사달라는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에게 의사가 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도대체, 저 작은 아이가 무엇을 안다고 바이올린 하나를 사주지 않는단 말인가? 바이올린.

그제야 여자는 숨을 참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지나쳐온 객실들을 향해.

전부 같은 사람이었다.

언니.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요? 언니?

...... 너... 바이올린 좋아하니?

바이올린이요? 네! 맞아요! 와, 언니 그거 어떻게 알았어요? 언니? 괜찮아요? 목소리가 왜 떨려요?

부모님이 바이올린 하는 거 좋아하시니?

아-뇨. 아. 정말. 얼마 전에 음악회를 갔거든요. 근데 바이올린 소리가 너무 좋은 거예요! 저는 그 악기가 바이올린이라는 걸 처음 알았어요. 그래서 부모님한테 졸랐거든요. 바이올린을 하게 해달라고 말이에요. 근데 부모님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더라고요. 부모님이 바이올린을 안 사주셔서 속상해요. 너무 속상하고...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요! 아빠도 바이올린을 하던 사람이었대요! 그런데 요즘은 바이올린을 안 켜세요. 전혀. 아빠한테 바이올린 얘기를 하면 얼굴이 안 좋아지는데... 아쉬워요. 너무 아쉬워요. 우리 아빠가 바이올린을 켜는 걸 보고 싶은데요, 아빠는 바이올린을 좋아하지 않아요. 끝에 잘하지 못했대요. 그게 무슨 말일까요? 끝에 잘 하지 못했다는 건? 어쨌든 아쉽다고 말하면 아빠가 슬퍼하겠죠? 그래서 말 안 할 거예요. 대신에 저는 다 잘하고 싶어요. 공부도 잘하고 바이올린도 잘해서 아빠한테 이만큼 다 잘할 수 있다는 거 보여주고 싶어요... 언니...? 왜 울어요?

여자가 다시 뒤를 돌아보자 보이는 건, 긴 복도. 복도마다 열려 있는 객실 문. 그 문 사이에 이 어린아이가 노력했던 시간들이 펼쳐져 있었다. 완벽해야 한다는 불안감 때문에 밝은 모습이 조금씩 사라진 어떤 여자의 모습이 있었다. 여자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가 가야 하는 객실 칸이 어디인지 알 것도 같았다. 어느 객실의 문을 열자, 보이는 건, 마주 앉아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젊은 부모의 모습. 아버지는 아이의 미래를 이야기하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건 너무 힘든 길이야. 나는 내 아이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언니?

잘 가.

어... 네. 근데 어떻게 알고 왔어요? 부모님이 있는 거 알고 있었네요? 언니도 울지 말고 잘 가요!

아이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곤 뛰어갔다. 여전히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젊은 부모를 향해. 여자는 객실 문을 닫고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절로 풀렸다. 아까 그 여자를 도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아무도 돕지 못할 테니까.

얼마간 앉아있던 여자는 천천히 일어나 거꾸로 객실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덟 살의 소녀는 혼이 나는 와중에도 고집을 풀려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불안한 눈을 뜨고 한숨을 쉬었다. 객실 문을 닫고 그다음 칸으로 갔다. 조금 더 큰 아이는 저금통 안에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동전을 밀어 넣고 있었다. 언젠가는 바이올린을 사겠다고 결심했는지 동전을 넣은 저금통을 책상 밑 서랍 속에 숨겨버렸다. 객실 문을 닫고 또다시 나아갔다. 아이는 점점 자랐고, 교복을 입을 나이가 되자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친구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예고를 진학하는 친구는 티 없이 맑은 얼굴로 웃으며 친구들과 한가롭게 잡담을 나눴고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공부를 했다. 음악 시간을 겁내 하는 얼굴. 어떤 객실에는 고등학생이 된 아이의 모습이 있었고 집에서 바이올린을 켜다 아버지에게 혼이 나고 있었다. 어떤 객실에서는 고등학생인 아이가 예고에 간 친구들의 인스타그램을 보며 표정 없이 앉아 있었고 어떤 객실에는 음대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들고 울고 있었다. 어떤 객실에는 대학의 선배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으며 어떤 객실에는 교수에게 혼이 나고 있었다.

마지막 객실에는 주저앉은 채로 울지도 못하는 고요한 모습이 된 아이가 칼을 들고 있었다.

이건, 다, 거짓말이다. 편안한 여정이 되라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새하얀 거짓말, 처음부터 편안할 수 없던 긴 여정, 여자는 자신이 있던 객실 문 앞에서 힘없이 앉아 뒤를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열어보았던 저 먼 객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려보낸 객실의 문은 닫혀 있었다.

여정은 편안하셨습니까?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안내자. 하얀 비단 원피스를 입고 표정 없는 얼굴로 단호하게 묻고 있는, 여자.

왜 당신은 제 모습을 하고 있나요?

누구나 자신의 모습을 마주할 필요는 있으니까요. 괜찮으셨습니까?

저는 아직 안 죽었나요?

당신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시겠습니까?

무슨...

자신의 모습을 한 안내자는 망설임 없이 등 뒤로 닫혀 있던 벽을 밀었다. 벽이 바닥에 긁히는 소리를 내며 스르르 열리자 보이는 건

끝없이 펼쳐진 객실들.

눈이 아리도록 환한 빛의 무리들. 별무리가 가득했다. 저 끝까지. 무한하게 이어진 객실 칸은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았고 영원토록 그 자리에 있기라도 할 것처럼 고요했다. 긴 복도 끝은 까만 점으로 모여들고 있었고 그 점의 테두리에서 밝은 빛이 일렁였다. 닫혀 있는 객실 문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원하신다면 이 뒷칸을 더 이어나가실 수 있습니다. 객실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무엇이든 원하시는 대로 넣으실 수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객실 칸 개수는 무한합니다. 얼마든지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물론 원하신다면 말입니다.

이용하시겠습니까?

 

 

 

늙은 남자의 모습을 한 안내자는 어느 수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빈칸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쓰인 글씨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선잠에서 들리는 그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 기차에는 당신만 타고 있으니 놀라지 말아요. 나는 잠깐 안내를 하러 왔을 뿐이에요.

이곳은 긴 여정을 위해 마련된 기차입니다. 이 기차는 따로 역이 없으니 이해해주시길. 동행하시는 분이 없다면 제가 동행자를 안내해드립니다. 동행자와 저를 제외하면 이 기차에는 손님만 타고 계십니다. 편안한 여정 되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잠 속으로 밀려들어갔다. 안내받은 수기 책에는 그 남자의 생애가 적혀 있었고 남자가 탄 객실 칸 뒤로 끝도 없이 이 사람의 과거가 담기기 시작했다. 안내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객실 칸을 열었다. 객실칸 한쪽 옆에는 그 남자의 과거가, 한 쪽 끝에는 벽이 있었다. 나이 든 남자는 졸고 있었고 안내자는 벽을 밀었다.

벽 뒤에는 여전히 무한하게 펼쳐진 빈 객실. 별빛이 춤추는, 어느 남자의 가능할지도 모르는 미래가 놓여 있었다. 안전하게 놓여 있는 빈 객실의 모습을 확인한 안내자는 문을 닫았다.

남자가 눈을 뜨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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