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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하시태그] 선명한, 벽

by ___hashi___ 2020. 7. 12.

#잡고_있던_손이_너무_아파서_로_시작하는_글쓰기

 

잡고 있던 손이 너무 아파서 얼른 손을 놓아 버렸다. 깨끗한 유리잔 안에는 차가운 소다수가 담겨 있었고 시나몬 가루를 얹은 휘핑크림은 녹기 시작하고 있었다. 휘핑크림 옆에 살짝 올려놓은 체리를 바라보던 나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시리도록 하얀 대리석 테이블 아래에서 고양이가 낮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겨우 말을 참다 한 마디 뱉었고.

언니, 나쁜 사람이네요.

...미안.

괜찮아요. 사실 알고 있었어요.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 애는 나를 보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한가롭게 그루밍을 하던 고양이는 눈치 빠르게 얼른 테이블 밑을 빠져나갔고 그러나 나는 자리에 앉아 매끄러운 유리잔을 따라 흐르는 작은 물방울을 지켜보았다. 고집스럽게 앉아 있던 그 애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언니. 있잖아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 저는 그날 생리통 때문에 너무 아파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는데, 언니가 저 데리고 보건실 같이 가 줬잖아요. 사실 저는 보건 싫어해요. 보건이 싸가지가 없어서. 알죠? 그 여자 유명한데. 그래도 언니가 같이 가줘서 약도 먹었고 나중에는 정말 괜찮아지더라구요. 언니 알죠? 저 생리통 진짜 심하잖아요. 언니, 언니가 베푼 호의가 호감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거 알고 있는데요, 나 같은 사람은 언니 같은 사람한테 기대게 되는 거 있잖아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저는 한 번도 남자를 좋아해 본 적이 없거든요. 별로예요, 남자는. 가끔 번호 물어보던 남자들도 있었는데요, 정말 마음이 없어서 연락 다 씹고 무조건 차단했거든요. 그런데 언니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또 생각이 날 것 같고, 언니랑 더 오래 대화하고 싶고, 그래서 물어봤어요. 번호. 그런데 알게 된 거죠. 언니는 저한테 관심이 없다는 사실 말이에요. 언니는 선생님을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언니, 있잖아요.

그 애는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마주 앉은 나는 여전히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있었는데도. 빈 테이블을 손으로 몇 번 쓸어내리던 그 애는 서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고 있잖아요, 그렇죠? 언니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 선생님이 언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애는 거기까지 말하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니까 여전히 나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말이었고 그러나 나는 녹기 시작한 휘핑크림을 떠먹는 일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 애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놀랍지 않은 사실, 그 애는 도저히 나를 포기할 마음이 없다는 놀랍지 않은 사실보다는 녹기 시작한 휘핑크림이 더 재미있고 달콤했다. 그 애는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은 카페 모카를 겨우 한 모금 들이키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유리 정원의 견고한 벽. 습관처럼 유리벽 밖을 내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언니. 알잖아요. 우리는 나갈 수 없어요. 언니, 정말 쓸데없는 일 하는 거예요. 인정하라구요. 그러니까 언니, 부탁이에요. 그 선생님, 정말 괜찮은 사람이에요. 맞아요. 하지만 언니, 이제 그 사람 잊어요. 그렇잖아요.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서 자살한 사람을 뭐 하러 붙잡고 있는 거예요?

그만해.

나는 더 이상 대화하기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 다운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지만. 사실 그 애의 말이 옳다. 이 유리벽은 견고하다. 여기서 평생을 나고 자란 우리는 벽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이 안의 교사들은 표정 없는 눈으로 방긋방긋 웃곤 했지만 그녀는 달랐다. 내가 사랑했던 그녀는, 거의 늘 웃지 않았다. 그러나 웃지 않는 사람이 그렇게 큰 꿈을 가질 수도 있다는 건 그녀에게 배운 사실. 그녀는 자살했다. 그리고 그녀의 꿈을 대신 품어줄 사람은 없었다.

그 애는 다 녹은 휘핑크림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어설프게 웃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 가느다란 손끝은 하얗게 질려 덜덜 떨고 있었다.

언니. 난 여기서 교사가 될 거예요. 그 사람들 얼굴 봤잖아요. 그렇게 티 없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겠어요?

그렇지 않은 선생님들도 많아. 너도 알잖아.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보건 선생님은 몇 안 되는 바른말하는 사람이지. 그래. 네 말이 맞아. 난 얼마 전에 자살한 그 선생님을 사랑했어. 잘 웃지 않는 사람이라서 이상했거든. 있지, 티 없이 맑은 사람은 생각만큼 많지 않아. 다 나름의 고충이 있다고.

하. 역시. 언니는 어른스럽게 말하네요.

어른스럽다. 그건 내가 별로 좋아하는 말이 아니었고 대답 대신 입을 다물었다. 그림자가 천천히 기우는 오후에도 아이들은 마당을 뛰어다니지 않았다. 이제 저 유리벽을 누군가는 넘어가야 한다. 그녀가 죽기 전, 우리에게 그다음 시도를 할 수 있는 용기를 주고 갔는데, 어느 누구도 벽을 넘는 일에 뛰어들지 않았다. 나도 그랬고. 그래도, 이 안의 사람들이 이 유리잔 안의 깨끗한 탄산수처럼 맑기만 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모두가 조금씩 숨을 급하게 내뱉었고 그러나 모두들 자신들이 질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언니. 나는 나가고 싶지 않아요. 정말 언니는 나쁜 사람이에요. 몇 년을 언니 때문에 앓았는지 몰라요. 겨우 용기 내서 한 고백이었는데, 그렇게 보기 좋게 차 버리고. 알고 있어요. 언니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건 상관이 없는데, 정말 언니는 끝까지 고집을 버리지 못하네요? 그게 너무... 너무 답답해요. 언니. 그만 하라니까요? 우리는 나갈 수 없어요. 왜 그걸 몰라요?

먼저 갈게.

나는 더 이상 그 애를 돌아보지 않고 테라스 문을 열고 나왔다. 밖에는 인공으로 만든 바람이 물기 없이 뺨을 스쳤다. 어딜 가나 조용했고 모두가 서로에게 상냥했다. 무감하게. 그 애의 고충은 무엇이었을까? 테라스 밖의 인공 잔디를 몇 발자국 밟고 나자 그제야 그 생각이 났다. 그래서, 그 애에게 고충은 나였을까? 내가 전부였을까? 하기야. 이렇게 좁은 유리벽 안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고민의 종류는 많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 두 가지 모두 나름대로 괴로운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무리수를 둔 것일까? 이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연애’라는 걸 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내가 간절했을까? 난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생각하지 못했던 짧은 폭발음이 들려 놀란 나는 순간 숨을 삼켰다. 벽 안은 모두가 잠든 듯 조용했다. 좋지 않은 예감.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사방에 날렸다. 방금 걸어 나온 테라스에서 비롯한 폭발음은 곧 잠잠해졌다. 그러나 번지는 불길은 그대로였고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걸어 나오지 않았다. 등 뒤에서 전해져 오는 서늘한 감각. 그 애가 나를 바라보며 웃던 서늘한 미소.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 하얀 대리석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가느다란 그 손. 너무 손을 세게 잡고 있으면 아픈 건 당연하잖아. 나는 몸을 추스르며 입고 있던 가디건의 단추를 여몄다. 내 옆으로는 아까 테라스에서 만났던 고양이가 냐아- 하고 서럽게 울며 나를 따라왔다. 그러나 나는 고양이를 보지 않았고, 저 앞에는 기적처럼 견고한 성이 하나 버티고 서 있었다. 유리 파편이 흩날리는 이 허공 너머에 번져가는 불 그림자. 불 그림자로 물든, 무너지지 않는, 어느 유리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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