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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굿바이, 미세스 문

by ___hashi___ 2020. 6. 28.

#달에서_걸려온_전화_로_시작하는_글쓰기

 


안녕하십니까. 죄송하지만 거기는 어디인지요? 여기는 달입니다. 예. 맞습니다. 지구의 위성 말입니다. 지구 중력의 육분의 일의 중력이 작용하는, 공전 주기와 자전주기가 27일로 같은, 지구 자기장의 1% 정도의 자기장을 갖고 있는, 예, 바로 그 위성입니다. 얼마 전 행성 간 연합에서 탈퇴하기는 했습니다만, 애초에 달은 행성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행성을 도는 이 작은 위성이 무슨 권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길. 단물 다 빨아먹고 이제 와서 행성에 도움을 요청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신다면, 오해 마시길.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애초에 위성에서 사는 저희가 행성 간의 알력 싸움에 끼어들 여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에 토라져서 행성 간 연합에서 탈퇴한 것은 아닙니다. 자치권을 얻기 위해 연합에서 탈퇴했다는 소문도 들리긴 했습니다만, 알고 계십니까, 위성들은 자치권을 위해 오랜 시간 싸워왔습니다. 행성 간 연합과는 상관이 없는 말이다 이겁니다. 거기다 생존권 앞에서 자치권이라는 건 한낱 종이조각에 불과하지요. 그렇습니다. 저희는 생존이 위험해졌기에 연합에서 탈퇴했습니다.

위성도 그렇지만 행성도 그렇지 않습니까? 구심점이 되는 무언가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게 저희는 지구였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태양이었던 것이지만요. 그런데 저희가 부당한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건 위성간 연합에서도 동의한 바입니다. 목성의 위성인 이오와 칼리스토는 특히 크게 목소리를 냈습니다. 목성의 거대함 때문에 위축이 되어서였을까요? 어쨌든 행성에 비하자면 훨씬 적은 수의 우주 정거장을 갖고 있는 것부터가 불합리하다는 건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자연스레 교역이 활발할 수 없는 조건에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요? 가난한 이들은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많은 경험을 할 수 없으니까요. 거기다 그 높은 관세는요? 교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는데 관세를 그렇게 높게 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치권도 저희에게 없는 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각 위성은 행성의 관할 아래 있지 않습니까? 우주 개발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22세기 이후로 300년을 위성의 자치권을 위해 싸워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 되어버리긴 했습니다만.

언론에서 덮으려 노력하기는 했습니다만 다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목성과 지구의 알력싸움 말이죠. 두 행성 사이에 일이 터지리라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렇기에 전혀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한 겁니다. 목성 사람들의 그 다혈질 성격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이럴 수가, 화성에서 일이 터지다니요.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이었을까요? 그렇다면 두꺼운 대기층에 이불을 덮은 듯 살고 있는 금성의 사람들은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걸까요? 수성은 그 해결책을 고농축 대기를 만들어내는 인공위성과 높은 중력을 만들어내는 센서로 해결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이죠. 어쨌든, 우주 개발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지 300년이 지난 지금, 교역에 관한 문제가 아닌 화성 환경에 대한 문제로 시비를 걸다니, 위성 연합에서도 화성인들이 찌질하다고 수군거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저희는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던 것입니다. 행성 연합을 탈퇴하는 것. 그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어설프게 가져온 명목 아래에 무슨 목적이 있는지 눈에 뻔히 보였으니까요. 이제는 태양계라는 없는 거니까요. 그렇죠? 태양이라는 별 아래에 조화롭게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이라는 건 가능하지 않죠. 화성뿐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정복 전쟁을 시작하고 싶은 것이잖아요? 인정하겠습니다. 많이도 참으셨습니다. 삼백 년이라는 시간을 참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그런데 말이죠. 그 첫 번째 희생자는 누구일까요? 당연히 위성 아닐까요? 위성부터 차근차근 정복해야 행성을 칠 가오가 서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저희는 스스로 사라지기로 결심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건 좋은 결정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이제 와서 하는 말입니다만, 이 결정은 백 년 전에 이미 내린 것입니다. 오래도록 준비를 해 오고 있었으니 일을 진행하는 수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각 위성은 모두 폭파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희를 정복할 일은 없습니다. 사라질 테니까요. 제대로 이 작은 위성의 핵에 도달할 탄도 미사일을 개발해왔고 성능 또한 검증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여러분이 발견한 정체불명의 작은 폭발은 이름 모를 초신성으로부터 비롯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저희들의 탄도 미사일 실험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었지요. 이제 아시겠습니까?

달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구의 자전축은 달이 있기 때문에 안정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겁니다. 달이 사라지면서 자전축이 기운다면? 지구의 사람들은 안전하게 살 수 있을까요? 날씨가 극명하게 바뀔 텐데요? 어디 지구뿐이겠습니까? 각 행성의 위성들이 일제히 사라진다면? 지구처럼 작은 질량의 행성도 그 난리가 나는데 하필 목성은 네 개의 위성을 갖고 있죠?

이건 협박이 아닙니다. 그냥, 작은 전조를 읊어드리는 것에 불과하니 노여워하지 마시길.

아. 거긴 지구입니까? 지금 사과를 하시는 데에 이유가 있으실까요? 죄송하지만 받지 않겠습니다. 거의 처음 아닌가요? 위성에서 행성의 공식적인 사과를 거절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은 거절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일까요? 그야, 거절할 만한 권력이 없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여러분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겁니다.

달은 예로부터 음의 기운과 여자를 상징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이 척박한 땅에 살면서 음의 기운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대기가 없어 극명한 날씨.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대지와 쉴 새 없이 날아드는 크레이터. 깊이 파인 협곡이 보여주는 생명 없는 절망감. 그러나 아십니까? 달은 여성을 상징하기도 한답니다. 절망감이 깊은 여성일수록 가장 뜨겁게 타오를 수 있는 법이지요. 아주 작은 불꽃만 일으키면 됩니다. 여성은, 의지가 강인하니까요.

전쟁은 여성의 역사가 아닙니다. 위성의 인구 비율이 여성이 더 높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소외된 저희들은, 예, 저 또한 여성입니다, 새로운 공동체가 필요했죠. 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했습니다만, 그 테두리 밖은 가난이라는 걸 잠깐 몰랐던 것도 같습니다. 물론 의지와 연대로 일어나긴 했지만요. 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전쟁은 시작하려 하고 있고 이제 우리 위성은 오래도록 준비한 일을 해낼 것입니다. 부의 테두리 밖은 가난입니다. 소외이며 음의 기운이고 연약한 여성입니다. 그러나 알고 계십니까?

혁명은 여러분이 업신여기는 가난 속에서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연락은 끊어졌다. 관제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목소리를 높이며 얼른 위성 간 연합 본부 센터에 신호를 보냈고 그러나 레이더는 잡히지 않았다. 대책을 떠드는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이었으나 하나같이 실효성이 없었다. 결국 몇 분이 지난 끝에 모두가 입을 닫았다. 백 년을 준비한 일이다. 그 끈기와 의지는 인정해야 했다. 그렇다.

우리의 패배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더 한 파멸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하나의 생명과도 같은 파멸의 전주가 울리자 나는 눈을 감았다. 행성 연합 본부 관제실에 연락을 취할 겨를도 없었다. 곧 자전축이 바뀔 것이고 이제 나는 없는 사람이다. 나뿐이겠는가? 대신 고요히 작별을 고했다. 연약하지만 강인한, 곧 타오르는 불이 되어 사라질, 멀고도 가까운, 너무 잘 알고 있었으나 가장 모르고 있던, 어느 위성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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