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3년에 제작된 다비드의 유화 <마라의 죽음>을 본다.
사실, 별로 좋아하는 그림은 아니다.
미감이 좋은 내가 보기에 <마라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래도록 오르내릴 정도로 대단한 그림은 아니다. 그냥 그 그림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의미가 있는 그림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잘 그린 건 사실이다. 심장에서 고요히 흐르고 있는 검붉은 피와 수축된 근육 때문에 편안히 늘어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경직된 몸. 펜을 쥐고 있는 팔의 긴장감. 그리고, 화폭 왼편에서 비춰 들어오는 빛. <마라의 죽음>에서 그나마 건질 수 있는 것은 빛 하나뿐이다. 일그러진 얼굴 위로 따뜻하게 비춰 들어오는 바깥의 빛. 마라는 욕조 안에서 삶이 끝나버렸지만 그 좁은 욕조 밖에는 여전히 해가 떠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인간 삶에 대한 가벼운 회의 정도? 그리고, 죽음 속에서도 여전히 따뜻하고 아름다운 빛 정도? 그 정도만 언급하면 되지 않을까?
오늘도 헨리를 괴롭히러 가야지.
도서관은 내가 재미있어하는 장소 중 하나다. 죽은 듯하지만 고요히 살아 있는 장소. 그런 걸 보면 가슴이 뛴다. 괴롭히고 싶어. 아직 안 죽었다는 걸 조금 더 확인하고 싶어. 도서관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하면 제일 좋은 일은 역시 큰 소리로 떠드는 것. 시끄러운 도서관도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토론을 위해 존재하는 도서관. 그런 곳은 너무 거창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곳을, 집요하게 고요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있는 무언가를 좋아한다.
재미있잖아.
나는 일부러 발에 힘을 주고 큰 소리로 도서관 바닥을 밟으며 사서를 향해 나아갔다. 유영하듯, 미끄러지지 않고 일부러 군인처럼 걸었다. 사서인 디아나는 내가 도서관에 들어왔을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쟤는 나를 꽤 싫어하지. 아.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겠군. 내 이름은 메프. 내가 지은 이름이다.
안녕, 디아나.
야. 아까 인사를 하던가, 이제 와서 안녕- 은 뭐냐? 얼빠졌나?
디아나는 사서답지 않게 입이 험하다. 그래서 디아나는 재미있다. 이 젊고 아름답지만 창백하며 다혈질인 사서는 사람들과 싸우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정확하게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다. 그런 그녀가 도서관에서 일을 할 수 있다니. 대단한데.
야. 너, 방해야.
응! 알아.
시발.
이거 대출해줘.
너, 어차피 보지도 않을 거잖아. 애초에 대출증도 없잖아?
대출증 없어도 대출 할 수는 있잖아?
큰 소리로 말하지 말라니까?
디아나. 너도 목소리 큰데?
디아나의 일터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녀는 내 멱살을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가히 놀랄만한 침착함을 발휘해 심호흡을 하며 나를 째려보았다. 그리고는 얼른 내 손에 들려 있던 도록을 뻇어 들고 대출을 해줬다.
시발.
고마워!
큰 소리로 고맙다고 외치듯 말한 나는 주변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거나 자료를 찾거나 공부를 하던 사람들의 눈총을 한눈에 받으며 최대한 시끄럽게 도서관을 나섰다. 내 뒤로 나지막이 들리는 디아나의 욕 때문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 역시. 죽은 듯 살아있는 곳은 재미있어. 살아있는 듯 죽은 곳은? 그건 너무 재미없다. 죽은 것은 내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죽은 건 그냥 죽은 거다. 그건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더 새로운 게 나올 리도 없고. 물론 살아있다고 해서 새롭고 재미난 게 생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죽은 것보다는 살아 있는 게 더 재미있다.
천천히 도서관을 빠져나와 옆에 길게 이어지는 오솔길로 향했다. 헨리의 집에 더 빨리 갈 수 있는 길도 있었지만 나는 오래 걷는 길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얼른 도록을 펼쳐 <마라의 죽음> 페이지를 찢었다.
적당히 손 끝에서 까만 불꽃을 일으켰다. 거의 폭발 직전인 불꽃을 만들어볼까 싶었지만 이미 책을 찢었으니까 그건 그만두자.
<마라의 죽음>을 태워버렸다.
기분이 상당히 좋아졌다.
매캐한 타는 냄새가 나자 발걸음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 이 도록은 헨리에게 줘야지. 내가 뭘 태워버렸는지 맞춰보라 할까? 사실 좋은 질문은 아니다. 헨리는 금방 맞출 테니까. 도록 앞에는 목차가 있었고 목차에 없는 그림만 찾으면 되는 거니까. 그 생각에 목차까지 찢어서 태울까 생각했으나 곧 그 계획을 접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다 해도 눈치 빠르고 예술적 감각이 좋은 우리 예민한 작가님 헨리는 무슨 그림이 없어졌는지 얼른 알아낼 것이다. 당연히 다비드의 그림이 주우욱 나와 있는데 그 유명한 <마라의 죽음>이 없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괜찮다. <마라의 죽음>이 없어졌다는 걸 알아맞히는 것보다 더 보고 싶은 건 헨리의 표정이니까. 당혹감. 왜 책을 찢었는지, 찢은 페이지는 어떻게 했는지, 디아나와 싸우고 왔는지, 책 대출은 어떻게 했는지 같은 건 헨리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런 곰팡내 나는 규칙에 관심을 가질 정도로 헨리와 내가 재미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예술가인 헨리는 예술가답게 찢어버린 페이지가 왜 <마라의 죽음>이어야 했는지 고민할 것이다.
헨리는 죽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나에게 죽음은 상당히 가벼운 것이다.
얼마간 더 걷자 헨리의 집이 눈에 보였다. 죽음을 그린 그림은 많다. 죽음을 쓸데없이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화가들이 애를 썼는가. <오필리아의 죽음>은 내가 싫어하는 그림 중 하나다. 왜 죽음을 꾸며내야 하는가? 꽃 사이에 누운 오필리아는 차마 다 죽지 못하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처럼 화폭 위에 누워있다. 그건 작가가 오필리아를 아름답게 그리겠다고 너무 자각하며 그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필리아는 무게 없이 죽어있다. 아주 가볍게. 꽃 몇 송이 놓는다 해서 그녀의 죽음이 아름다워지는가? 그 빛이 아름다운가? 녹색과 노란색 사이에서 감을 잡지 못한 빛이? 죽음에 대한 인간의 위선에 박수를 보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내가 좋아하는 죽음에 대한 그림이 있다면, 모네의 <영면하는 카미유>. 그건, 죽어 있지만 가장 열렬하게 살아 있는 그림이다. 가장 열렬하게 인간 그 이상의 것을 만들어 내고 있는 그림. 가장, 열렬한 인간. 카미유를 누가 죽었다고 말할 것인가? 그렇게나 생생히 살아 있는 그녀를? 오필리아보다 훨씬 아름다운 카미유.
헨리는 그런 사람이지. 죽어 있는 듯 거리를 두고 낯을 가리고 사람을 꺼리고 혼자 있으려 하지만 누구보다 열렬하게 살아 있는 인간.
아. 재미있어. 헨리. 괴롭히러 가야지.
그래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처음 보는 어린애가 나왔다. 헨리. 이렇게까지 살아있는 거였어? 이렇게까지?
역시. 헨리는 재밌어.
카론의 진료실 천장에는 한가운데에 스테인드 글라스 등이 달려 있었다. 메프가 카론에게 선물해준 것이었다. 엷은 베이지 색에 짙은 초록색 포인트로 변화를 준 스테인드글라스. 우산처럼 펼쳐진 등은 생각만큼 화려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카론에게 잘 어울렸다. 메프는 미감이 좋았고 저 등도 본인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그 남자는 한 번도 아름다움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한테 도록을 하나 던져주던데.
음. 올 것이 왔군.
선생 말이 맞아. 아마 그것 때문에 왔을 거야. 그런데 미키를 본 거지.
그래도 숙제거리를 안겨줬다 그 말이지?
카론은 낄낄 웃으며 날카로운 눈으로 한 손을 내밀었다. 담배가 들려 있던 다른 손으로는 얼른 크리스털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나는 잠시 카론의 얇은 손가락을 바라보다 덜렁 들고 온 도록을 건네줬다.. 카론은 한쪽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안경을 꺼냈다. 카론의 책상 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책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찻잔을 둘 자리조차 제대로 만들기 힘든 그 책상 위에서 카론은 여유롭게 재떨이에 담배를 털어냈다. 안경은 책 사이에 끼어 있었는지 빼내자마자 불안하게 쌓여 있던 책탑 하나가 우르르 무너졌다. 카론은 무너진 책을 전혀 쳐다보지 않고 얼른 내가 넘긴 도록의 표지부터 살폈다.
흐으음. 그래. 하지만 메프가 좋아할 도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도록은 신 고전주의 시기에 활동한 작가의 작품을 모아 놓은 책이었고 메프는 신 고전주의보다는 인상파와 로코코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나는 도대체 그 녀석이 왜 이 책을 빌렸는지 조차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의 문제는?
카론은 가볍게 페이지를 넘기며 물었다. 나는 말없이 있다 다비드의 그림이 나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마라의 죽음>.
음?
그 그림만 없어. <마라의 죽음>. 한 시대의 유명한 그림을 모아 놓은 그런 도록에 <마라의 죽음>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카론은 내 말에 고개를 들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을 살짝 찌푸리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아. 그건 맞는 말이야.
몇 페이지를 더 넘기자 다비드의 그림은 끝이 나버렸다. 그러니까, 메프는.
<마라의 죽음>을 찢어서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다는 말인 거지?
아마 태웠을 거야.
그랬겠지.
카론은 책을 몇 페이지 더 넘겼다. 그러다 다비드의 그림들로 돌아와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페이지 사이에 찢긴 자국을 찾으려 했다. 찢어진 페이지를 찾은 카론은 손으로 얼른 찢긴 부분을 짚으며 헛헛 웃었다.
평소대로잖아..
그건, 맞는 말이었다.
메프 좋아하는데 처음 올리네 엥
첫문장은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
'창작 - 불온한 새벽의 재회 > 워드가 노래하는 바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말 합작] 네가 떠오르던 꿈 (0) | 2020.04.22 |
---|---|
[워노바] 레녹스씨의 녹색 정원 (0) | 2020.04.10 |
[워노바] 마음을 삼킨 거미줄2 (0) | 2020.04.06 |
[워노바] 마음을 삼킨 거미줄 (0) | 2020.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