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 헨리.
헨리는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카론 앞에서 딴청을 피울 수가 없었다.
당신은 재미있는 사람이야.
갑자기 칭찬이야?
당신처럼 유별나게 예민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특이한 사람이야, 당신은.
카론은 비웃는 듯 입을 비틀며 웃다 천장을 향해 살짝 고개를 들었다. 뒤로 느슨하게 묶은 긴 머리카락이 작게 흔들렸다. 하여간. 또 일장 연설이 시작되겠군. 헨리는 조금 성가시다는 생각과 함께 얼른 이 진료실을 뛰쳐나가고 싶어 죽겠는 마음 때문에 속이 답답했다. 무엇보다도 이 진료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카론은 정신과 약을 처방해 줄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진료실 벽마다 빼곡하게 걸어 놓은 드림캐쳐를 처방약으로 줄 때가 더 많았다. 그럴 때면 차라리 그녀가 돌파리 의사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헨리는 하나같이 자기주장이 강한 드림캐쳐들 때문에 눈이 아팠다. 그러나 마음 약한 헨리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 카론은 목 위에 한손을 얹고 눈을 감은 채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있잖아, 헨리. 예민한 사람은 원래 거짓말을 잘 해.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고 있으니 그 사람들을 배려해주거든. 그래서,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는 하지. 그런데, 당신은 그렇지 않아. 예민한 사람들 중에서도 유별나게 예민한 당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카론은 여전히 그 늘어진 듯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는 몸을 그대로 둔 채로 목에 올리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을 천천히 브이자로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건 두 부류야. 하나는, 자존감이 아주 높은 경우지. 다 알고 있어. 예민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응을 살필 줄도 알고,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고 있지. 그렇지만 자존감이 높기 때문에 상대가 자신을 비난할 것을 걱정하지 않는 거야. 그래서 진실만을 말하지. 다른 부류는... 그래. 남들한테 원하는 게 많은 부류야.
그렇다면 나는, 자존감이 높은가보군.
아-니.
카론은 살짝 젖혔던 고개를 가슴으로 끌어 당겼다. 목에는 여전히 한쪽 손을 얹은 채로, 차갑게 웃으며 헨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리게 빛나는 짙은 녹색의 눈.
자존감이 높으신데 왜 불면증 때문에 고생을 하고 계시나? 그게 아니야. 당신은 원하는 게 너무 많아, 헨리. 다 알고 있어, 당신은.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꿰고 있지. 그래도 당신은 구태여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마음이 불편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도, 솔직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말하고 싶어 한다는 뜻이야. 알겠어? 모든 인간이 그 정도로 성숙하기를 바란다는 거야. 그건 말이야. 음... 그래. 인간에 대한 이상이 높다고 말하는 게 좋겠군.
미키를 불러 오지.
헨리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진료실 문으로 향했다.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나, 인간은 성가시고 귀찮다. 물론 등 뒤에서 그대로 날아와 꽂히는 카론의 시선은 계속 느끼고 있었다. 헨리는 스스로 알고 있었다. 지금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가끔 사람에게는 도망이 가장 좋은 해답일 때도 있었고, 헨리는 지금이 그 때라고 생각했다. 카론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지만.
헨리. 자부심을 가져. 당신 나이가 돼서까지 이상이 그렇게 높기는 쉽지가 않아. 인정하도록 해. 당신은, 이상이 높은 사람이야.
헨리는 끝내 대꾸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전부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그건, 헨리는 좋은 어른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어른은 이상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 현실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나이가 들어서도 이상이 높은 이들은 사실 어른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천재거나, 얼치기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헨리는 스스로가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진료실 밖은 부엌이자 거실이자 대기실이었다. 소파 위에 앉아있던 미키는 얼른 고개를 들어 헨리를 바라보았다. 미키의 무릎 위에는 호야가 앉아 있었다. 까칠하고 도도한 고양이, 호야. 헨리는 유별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호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안녕, 호야.
호야는 귀찮다는 듯 쳇-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아. 귀찮냐.
하얀 털에 새겨진 까만 줄무늬가 우아한 고양이 호야. 호야는 스스로를 백호라고 소개하고 다녔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백호 무늬를 한 영락없는 고양이였다. 호야의 호박색 눈이 천천히 감겼다. 미키는 호야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고 방긋방긋 웃으며 호야의 털을 쓰다듬어줬다. 그러나 헨리는 미키를 카론에게 들여보내야 했다.
그... 호야. 자면 안 돼. 이제 미키 들어가야 해.
미키는 헨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진료실을 향해 눈을 돌렸다. 호야는 귀찮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헨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헨리도 호야에게 뭔가를 더 해줄 수는 없었다. 호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키의 무릎에서 천천히 일어나 미키의 옆자리로 뛰어 올랐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천천히 기지개를 켠 호야는 크게 하품을 한 번 했다. 미키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로 뛰어 들어갔다. 미키가 뛰어가고 남은 자리에는, 호야가 빠뜨려 놓은 몇 가닥의 고양이털이 춤을 추고 있었다.
흐으응. 한심한 인간이구만.
알아, 호야.
그래서.
뭐가.
저 꼬맹이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가?
호야는 헨리 옆에서 느긋하게 앞발을 핥으며 속 편한 말을 뱉었다. 헨리는 얕은 한숨을 쉬고 소파에 몸을 파묻고는 눈을 감았다.
응.
저 꼬맹이는 꼬맹이들 중에서 어른스러운 편이야. 비극이지.
알아.
뭐, 그게 너탓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 부모가 죽은 애들이 다 큰 인간 놈팡이들을 닮아가는 건 어쩔 수 없어.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던 거야, 이건.
호야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말을 뱉었다. 그렇다고 위로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진실을 꿰뚫어보는 고양이, 호야. 언제나 가장 정확한 진실을 보는 고양이. 헨리는 순간 호야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결국 팔짱을 꼰 채로 진료실을 향해 신경을 집중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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