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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 불온한 새벽의 재회/워드가 노래하는 바다

[워노바] 레녹스씨의 녹색 정원

by ___hashi___ 2020. 4. 10.

소아과 의사 레녹스씨

헨리와 레녹스가 조금 친해진 이후의 이야기


*

녹스.

레녹스는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선잠에서 깼다. 깜빡 졸고 있었나? 병원 뒷마당에 만들어 놓은 조그마한 정원에서 눈을 뜬 레녹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헛소리라도 들은 건가. 레녹스는 고개를 잠깐 젓고 벗고 있던 안경을 썼다. 누군가가 오는 소리르 들은 것도 아니니 어쩌면 착각을 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레녹스는 자기 앞에 낮게 피어 있는 꽃풀을 바라보았다. 토끼풀, 제비꽃, 민들레, 냉이꽃. 사실 레녹스는 꽃보다도 큰 나무를 더 좋아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 큰 나무의 존재가 굉장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저 거대한 크기가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겠지. 그러나 곧 생각을 멈추고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곧 일어나야 할 시간이니까. 헨리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레녹스보다 네 살 어린 중년의 남자 헨리는 답지 않게 갑자기 아빠가 되는 바람에 레녹스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은 그 때문에 만나자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레녹스는, 할 일이 언제나 많지만 파업하기를 즐겨 하는 헨리가 편집자들과 기자들을 피해 이 정원으로 피신을 오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이 정원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도 만들어야겠군.

낮은 벤치에서 일어나 의사 가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하품을 길게 했다. 큰 키에 꺼칠한 얼굴에는 턱과 코 밑에 수염이 나 있었다. 덮수룩한 곱슬머리는 답답해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를 조금 더 부드럽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밝게 빛나는 녹색 눈과 둥글게 휘어진 눈매도 따뜻해보였다. 아이들은 소아과 의사인 그를 좋아했다. 아이들은 그가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레녹스는 뒷목을 긁으며 천천히 정원 가운데로 걸어갔다. 정원 가운데에는 작은 지붕을 얹은 야외 테라스가 놓여 있었다. 딱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원탁 하나만을 두고 있는 테라스. 레녹스는 나이 어린 간호사들이 병원 안에서 즐겁게 웃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자신이 차를 내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원으로 향하던 그의 등 뒤로 아까 들렸던 그 목소리가 다시 레녹스를 불러 세웠다.

레녹스.

뒤를 돌아보자, 정원 둘레에 피어 있는 양귀비 사이에 서 있는 헨리가 보였다.

 

자네,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

올해 양귀비는 처음 봤어. 작년에는 그래도 많이 본 것 같은데.

헨리는 가득 피어 있는 양귀비에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하얀색, 붉은색, 주황색, 노란색의 양귀비들이 아우성치듯 가득 피어 있는 정원의 둘레. 레녹스는 페퍼민트 차를 입에 가져다대고 잠깐 눈을 감았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잠이 잘 안 깨는군. 여전히 눈을 비비던 레녹스는 꺼칠한 얼굴의 헨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문득 헨리는 고개를 돌리고 레녹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양귀비를 저 끝에 심어 놓았어?

음?

조금 더 이 안으로 가져오면 안 되는 거야?

그건 의도 없는 순수한 질문이었고, 레녹스는 천천히 찻잔을 티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작은 지붕이 만들어주는 그늘 덕분에 눈을 부시게 만드는 햇빛을 피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헨리의 표정은 조금 더 잘 보였다. 그는 궁금해 하고 있었다.

뭐...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좀 아쉽기는 해. 사람이 지나다니기 좋게 하느라고 여기는 전부 잔디만 심었지. 그런데 지금 보니까 자네 말대로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을 종종 해. 꽃들이 저 끝에서 저러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아.

레녹스는 입고 있던 가운을 벗고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았다. 따뜻한 차를 마시기에는 이젠 조금 더운 날씨가 되었다. 곧 있으면 얼음을 얼려야 하는 계절이 오겠지. 헨리는 턱을 괴고 앉아 레녹스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레녹스의 생각을 읽고 있는 것 같았지만 뭔가를 더 물어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연못이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뭐야, 자네, 그런 낭만이 있는 사람이었나? 첫 인상으로는 차가워보여서 그런 낭만은 없을 줄 알았는데.

부정하지 않겠어. 차가워 보인다는 말도, 낭만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도. 이래봬도 난 작가잖아.

헨리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고 셔츠 주머니에 대충 찔러 넣었던 만년필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나 타자기로 글을 쓰는 그에게 만년필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냥 급할 때 뭔가를 쓰려고 들고 다니는 것이었고, 그마저도 자주 잃어버려서 싼 것만 사서 썼다. 만년필이 아닐 때도 많았다. 레녹스는 헨리가 정리를 잘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는 입고 있던 가디건의 앞섬을 조금 추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앉고 눈을 감았다. 눈 밑에는 다크써클이 내려와 있었다. 또 잠을 못 잤군. 레녹스는 보풀이 가득 인 헨리의 가엾은 가디건을 바라보다 중요한 걸 놓쳤다는 듯 얼른 물었다.

미키는?

아... 애잖아. 자네 개를 좋아하던데.

헨리는 여전히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한 손을 들어 올려 레녹스의 병원을 가리켰다. 과연, 그 안에서는 남자아이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레녹스는 속으로 안심했다. 헨리가 그 정도는 지키는 어른이구나 싶어서. 헨리는 레녹스가 무엇을 다행으로 여기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미키가 레녹스의 개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낮게 따뜻한 봄바람이 불었다. 폭신한 담요처럼 두 남자를 감싸고 멀어지던 바람의 끝에 작은 풀잎이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잠깐 하품을 한 헨리는 잠속에 잠긴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카론 선생이랑은 어떻게 아는 거야...

왜, 갑자기?

그렇잖아... 그 선생은... 그러니까...

자네랑 좀 안 맞지?

뭐...

그렇다고 레녹스가 헨리와 아주 잘 맞는 것도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까다로운 헨리와 잘 맞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레녹스는 헨리와 어울리기에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레녹스는 카론 때문에 쩔쩔매는 헨리의 모습을 떠올리며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헨리는 잠깐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야.

아니, 그냥. 뭐.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야.

뭐? 미쳤어? 무지 오래 됐잖아!

으, 응. 근데, 미칠 것까지야...

아니, 그렇잖아! 그 사람을 어떻게 견뎠어?

어? 아니, 잠깐만 헨리. 하하.

레녹스는 두 손을 얼굴에 올려놓고 쾌활하게 웃었다. 하기야, 지금까지 레녹스가 카론과 맺은 인연도 레녹스의 배려심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대단하잖아. 얼마나 참아준 거야?

내가 참아줬다는 사실은 알고 있네?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 아냐.

헨리는 작게 툴툴대며 테라스 밖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연못이 없는 걸 아쉬워하면서.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은데도 헨리는 꿈쩍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높이 자란 나무들 틈으로 몇 마리의 새가 빠르게 날아다녔다. 잠깐 손목시계를 확인한 레녹스가 양귀비를 바라보고 있는 헨리에게 물었다.

그래서, 언제까지 땡땡이야?

뭐. 나 오늘 파업이야.

맨날 파업이네?

아니야. 오늘만이야.

자네, 얼마 전에도 파업이었잖아.

이봐. 일은 인간 본성에 맞지 않아. 하기 싫은 게 그 증거야.

말로는 자네를 도저히 못 이기겠군.

레녹스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헨리는 미키가 저 작은 병원 안에서 개와 낑낑대는 것보다 이 정원으로 나오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병원 문은 꿈쩍도 않았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미끄럼틀도, 시소도. 그저 정원의 둘레에 피어 있는 꽃들과 나무들, 작은 벤치 몇 개와 테라스뿐이었다. 헨리는 조금 의아해져 물었다.

애들 놀 거는 없어?

음?

소아과잖아.

몸을 돌리고 양귀비를 바라보던 헨리는 한 팔을 등받이 위에 올려 턱을 괴고 레녹스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건, 할 법한 질문이었고, 사실 레녹스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속으로 삼켜온 이 정원의 그늘이었으며, 그래서 헨리가 예리하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작가구나. 적당히 둘러대기를 잘 하는 어른인 레녹스는 이번만큼은 헨리에게 맞춰주기로 했다.

여긴 원래 내 집이었어.

음.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뭐야. 알고 있었네?

구조가 그렇잖아. 병원이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부엌도 있고, 진료실에 딸린 화장실도 그렇고.

응. 애인이랑 살던 곳이었지. 이 정원을 좋아했거든. 항상 심심해서라도 공을 차던 사람이라, 꽃은 저 바깥에 심어 놓았지.

흐응. 그랬군.

헨리는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인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 않으면서. 그건 도를 넘는 호기심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레녹스는 헨리에게 맞춰주기로 마음먹었으므로, 또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입을 열었다.

괜찮은 남자였어. 떠났지만.

... 그랬나.

그러나 헨리는 더 반응이 없었다. 더 이상 양귀비가 아니라 그 옆에 피어 있는 붓꽃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레녹스에게 돌린 게 전부였다. 대신,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똑바로, 빠짐없이 그의 말을 들으며. 이런 때는 진지해지는군. 레녹스는 어깨에 걸려 있던 청진기를 테이블 위에 살짝 던져 놓으며 말을 이었다.

변덕이 심했거든.

응.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대신 거의 다 비워가는 찻잔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 찻잔에 유리 차받침. 엷은 녹색의 베일을 쓰고 있는 페퍼민트 차. 봄은 따뜻했고 정원 위에는 녹색의 적막이 내려앉았다. 헨리는 뭔가 할 말을 찾았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 편이 나았으니까. 그리고 레녹스는, 헨리가 연애를 잘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아저씨!

에-. 왔냐, 미키.

네! 선생님, 있잖아요! 마크는 원래 공을 좋아해요?

미키는 해맑게 웃으면서 얼른 테니스공을 높이 들어올렸다. 레녹스는 미키를 보고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응. 미키, 사실 거의 모든 강아지들이 공을 좋아해요.

와! 저는 강아지랑 살아본 적이 없어서 몰랐어요!

미키가 밝게 웃으며 밝은 갈빛으로 빛나는 레녹스의 리트리버, 마크를 쓰다듬었다. 헨리는 그 장면을 지켜보며 나쁘지 않은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헨리는 꿈쩍하지 않았다. 레녹스는 안경 렌즈를 닦으며 미키에게 유자차를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헨리가 끝내 돌아갈 생각이 없었으니까. 레녹스는 차를 타러 병원으로 잠깐 들어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까지고 그 사람에 대한 추억으로 이 정원을 나 혼자 갖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지. 헨리의 말이 옳았다. 그 남자와의 집은 병원으로 바뀌었고, 그 남자와 레녹스의 것이었던 이 정원은 마땅히 병원의 주인인 아이들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레녹스는 마크를 데리고 뛰어 놀고 있는 미키와 여전히 눈을 감고 등받이에 누운 듯 기대 있는 헨리를 보며 생각했다. 다음주에는 이 정원에 맞는 그네 하나를 주문해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