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지는 해가 만드는 긴 그림자 뒤에 짧게 새가 날았다. 어차피 더 할 말은 없었고 그래서 그 길을 돌아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았을 것이고 지켜볼 일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나의 행보를 궁금해 했고, 나는 항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 이상의 행보를 해냈다. 낮은 사람에게는 자비심을, 높은 사람에게는 정의감을. 하지만 모든 게 내가 예상한 대로 일어나지는 않는 법.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방심했다는 것 하나. 세월을 너무도 얕봤지. 코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우아하게. 몸이 시들고 있었지만 품위마저 잃고 싶지는 않았다. 이것도 하잘 것 없는 자존심이겠지만. 무심한 산의 능선 위로 밤의 그림자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나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어르신. 들어가시죠.
어느새 나를 따라 나온 이들의 말이 들렸지만 나는 잠깐 자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맞는 말이군. 초봄이라지만 날은 아직 싸늘했다. 옷을 얇게 입고 나온 터라 얼른 들어가야 했다. 땅 밑으로 꺼지는 몸을 겨우 지탱하는 두 다리가 언제까지 버텨줄 수 있을지 몰랐다.
나는 원본초. 한 때 천하를 가지려 했던 남자. 하지만 먹물처럼 번져나가는 밤하늘 아래에 내가 밟고 서 있는 땅은 너무도 좁았다. 하. 참. 우습기도 하지. 아만. 자네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내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렇게 약한 소리를 하게 되기까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기까지 나 자신을 얼마나 깎아내야 했는지.
저... 어르신.
알고 있네. 가지.
재촉하는 내 사람들의 말에 대답은 했지만 하늘을 올려다보는 고개를 숙일 수가 없었다. 아직도 한참일 것 같은데, 이제 내려놓아야 하는군. 그러나 끝내 미소는 잃지 않았다. 참 재미있는 일이지. 우스워. 그대. 나의 젊은 시절이여, 무엇이 그렇게 궁금했는가? 그대가 천하를 얻겠느냐고?
어느 누구도 얻을 수 없겠지.
그게 나의 대답이었다. 자네 가슴에 못을 박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리 말했다. 젊은 나에게는 한 끝 야망만이 전부였으니. 재미있군. 나의 젊은 한때를 마주하는 즐거움은 누구에게나 쉬이 누릴 수 있는 게 아니겠지. 그러므로 알고 있었다.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산 위의 그림자마저 어둠에 묻힌 밤. 자리에 들어앉고 나서야 올렸던 머리를 풀었다. 세월이 가둔 몸이라 하더라도 난 천하를 꿈꾸던 사람. 끝내 품위는 잃지 않으리. 꿈처럼 마주했던 젊은 나를 떠올렸다. 그의 끝내 참았던 말이 입가에 다시 맴돌았다. 그래. 그 말은 내가 해주지 않아도 되었다. 잘 참았다. 어차피 그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천하는 어느 누구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꿈을 꾸는 것은 자유다.
그 꿈이 너무 컸어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리에 들었다. 아주 멀리 가고 싶군. 아주 멀리. 아무도 가보지 못한 아주 드넓은 평야를 밟고 아주 드넓은 하늘을 날고...
그것은 내가 오래도록 꾼 꿈. 그리고 원본초, 나의 마지막 꿈이었다.
지금 멘세닉땜에 혼란한데(ㅎ) (@ Abigail__1223)님이 주신 첫문장입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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