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무슨 날이었던가?
파스타를 우물거리던 리온은 어색하게 웃으며 도망쳐버린 카이사르를 떠올렸다. 이상한데. 그의 입맛에는 한참 맞지 않는 담백한 파스타에 소금을 쏟아부으며 대원들의 표정을 되새겼다. 음. 나인은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는데 말이지. 아주라와 란더도 생각해보면 좀 이상했단 말이야. 내 앞에서 쩔쩔 매는 것 같았는데. 착각인가? 하지만 평소에 대원들을 잘 살피던 리온의 감이 틀릴 리가 없었다. 모르겠네. 소금을 듬뿍 버무린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음. 이제 좀 먹을 만해진 것 같은데. 대원들에게 이렇게 짜게 먹었다는 걸 들킨다면 잔소리를 듣겠지. 얼른 먹고 나가야겠어. 자러 가기 전에 녀석들이 왜 그랬는지 한 번만 더 살펴보고.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려는 리온이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딸랑하고 가게 종소리가 나면서 들어온 것은, 별지기였다. 아. 들켰다.
대장님! 여기 계셨- 아아아!
별지기는 한참 찾던 반가운 얼굴을 드디어 만났다는 달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금기가 가득한, 비어 있는 파스타 접시를 보기 전 까지는.
대장님! 또 소금 넣어서 드셨죠!
하하. 그게-
대장님은 정말 너무 짜게 드세요. 소금 좀 줄이셔야 해요.
아, 알았으니까.
어쨌든, 가요! 모두 대장님 찾고 있었어요.
어? 나를?
네. 아. 혹시 또 기억 못 하시는 거예요?
응?
리온은 어색한 얼굴로 뒷목을 긁적였다. 기억을 못 한다니. 뭘까. 별지기는 그의 무감함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다가 짓궂게 리온의 손목을 잡았다. 얼른 가자면서 활기차게 그를 끌고 가는 별지기의 뒷모습을 보며 리온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따라가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역시였다. 작년처럼. 리온은 오늘이 본인의 생일이라는 걸 또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리온을 위해, 타인을 위해 자신의 삶은 돌보지 않는 그를 위해 대원들이 생일 파티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정신없는 생일파티를 끝내고 돌아온 후로 피스메이커 외투도 벗지 않고 일하는 책상 앞에 앉았다. 피곤에 지쳐 눈이 감기려는 걸 참고 선물을 하나 둘 풀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열심히 고른, 정성을 들인 선물이었다. 흠. 녀석들, 나 때문에 꽤나 애썼는걸. 선물 옆에는 작은 초록색 노트가 놓여 있었다. 앞장이 살짝 벌어진 노트. 안에는 대원들이 나를 향해 꾹꾹 눌러쓴 편지가 적혀 있었다. 별지기가 쓴 것도 있구나. 녀석들. 노트를 덮고 잠깐 눈을 감았다. 설핏 잠이 오려는 것도 같았지만, 이상하게 눈을 감고 나자 오히려 정신은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나에게도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던 시절이 있었다. 나에게도. 나이가 어려서 그랬는지, 쉽게 희망했고 쉽게 웃었다. 에테르 재난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마물은 언제나 금방금방 생겨났고 작고 여린 것들이 제일 먼저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그럼에도 나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내 옆에는 동료들이 있었으니까. 아직 몰랐던 것이다. 지켜야 하는 게 있을 때만이 두려움도 같이 자라난다는 사실을. 끝까지 옆에 남아 있으리라 생각했던 동료들이 죽고 나서야 두려움을 알았다. 소중한 것을 잃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았고, 발버둥을 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끝까지 싸웠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어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두려웠으니까. 소중한 걸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즈음 나는 더 이상 쉽게 희망하지 않았고 쉽게 웃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마물과 싸우고 마지막 동료를 잃었던 날, 그를 내 손으로 땅에 묻으며 떠올렸다. 내가 지금까지 지켜오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손에 넣으려 안간힘을 썼던 것은, 소중한 사람들과의 기억. 그저 조금의 평화. 하지만 그날 내가 본 것은 저무는 해였다. 까만 산의 능선을 넘어 점차 사라져 가던 해의 모습. 길고 강렬한 한 줄기의 빛. 흙투성이인 내 손을 비추던 붉은 햇빛을 바라보며 내 곁에 남아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그날 깨달았어.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것이 실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음을. 동료들과의 기억은 흐릿하게 잔상만이 남았고, 나는 바짝 마른나무처럼 감정이 없었다. 그렇다. 죽은 동료를 위해 울어줄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마물과 계속 싸웠다. 마치 관성처럼. 여전히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싸웠으며, 그게 속죄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떠난 동료들을 위한 속죄라고.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감았던 눈을 뜨자, 창밖으로 저무는 햇빛 한 줄기가 집무실로 비쳐 들어오는 게 보였다. 길고 강렬한 한 줄기의 빛. 여전하군. 고개를 숙이자, 흙이 묻어 있는 건 아니지만 대신 상처로 가득한 손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는 무언가를 갖고 싶지 않았다. 갖게 된다면, 옆에 두게 된다면, 두려울 테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다시 동료가 생겨버렸군.
잃는다는 게 무엇인지, 기억에서 점차 사라져 간다는 게 무엇인지 알아버린 그는 그런 자신을 돌보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장이었다. 모두가 그에게 고민을 상담했고 그에게 마음을 기대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위태로운 인간. 정작 대장인 그가 기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기댈 수 없더라도 이 녀석들 옆에 있어줘야 하잖아. 어쩌다 생겨버린, 동료잖아. 리온은 덮어두었던 노트의 겉장을 손으로 훑으며 떠올렸다. 과거의 동료들과 나누었던 대화의 토막들을. 아주, 희미하다. 잘 떠오르지도 않는 그들과의 기억.
그때는 지키지 못했더라도, 이번에는 기필코-.
그는 대원들에게 기댈 용기가 아직 없었다. 하지만 지켜내겠다는 다짐만큼은 결연했다. 그는 스스로가 지나온 시간들을 실수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제대로 해내지 못한 실수라고. 그리고, 그 실수를 다시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요한 집무실 안에서 리온의 침묵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녀석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지. 리온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집무실 밖으로 향했다. 입가에는 단호하고 씁쓸한 미소. 떠나보낸 동료들과 지켜야 할 동료들 때문에 생긴 양가감정이 담긴 미소. 가장 잊고 싶었던 저녁, 그 해 질 녘을 회고하며 문 밖으로 나섰다. 흙투성이인 손이 상처투성이가 될 때까지 견뎌왔던 시간의 끝에는 새로운 동료들이 있었다. 저기, 문 밖에. 그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 그리고, 그는 아직 몰랐지만, 그들은 그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동료들이었다.
능선을 넘어간 해는 내일 다시 떠오를 것이다. 이제 떠오를 별이 어제도 떠올랐던 것처럼. 그건 리온이 지금껏 잊고 있었던 사실. 그러나 언젠가는 깨닫게 될 당연한 사실. 리온은 상처가 가득한, 서걱거리는 손을 주먹을 쥐고 말했다. 그도 모르는 미래를 향해. 웃으면서.
고맙다, 얘들아.
대장님 생일 추카해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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