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눈을 뜨자 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신전. 퍼디난드는 앉은 채로 두 손을 펼쳐 비어있는 손바닥을 보았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집무실에 있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신전이라고? 대별지기인 그는 라하가 아닌 신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것은 신전. 주변에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풀 한 포기 쉽게 자라나지 못하는 이스델라와는 참 많이 다른 곳이구나. 퍼디난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한 일인지는 알 것 같다. 그러니, 그의 놀이에 참여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 되지 않는 걸음을 걷자 신전 앞에 놓인 비석이 퍼디난드를 맞았다. 신전은 그 자체로 신의 위용을 드러내는 것이다. 비석에 새겨진 문장은 그 위용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었다.
tepi'o desaso'n maiosos.
당신의 빛에 이끌리나이다. 퍼디난드는 입으로 조용히 읊고 합당한 예절을 갖춘 다음 신전 안으로 향했다. 라하의 신전. 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저 문구가 아니라면 라하의 증표를 갖춘 것은 신전 안에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퍼디난드에게는 이 신전이 라하의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문구가 있었으므로.
신전은 놀라우리만큼 어두웠다.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었고 빛이 들어올 하늘을 지붕이 막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높은 천장을 받치고 있는 튼튼한 기둥과 바닥에 깔린 대리석이 그를 반겨주었지만,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작은 제단조차 없었다. 밖에는 그렇게 꽃이 많이 피어 있는데, 정작 신전에는 꽃 한 송이 없었다. 그러나 퍼디난드는 조금의 의구심도 갖지 않고 그게 라하의 뜻이라 생각했다.
이 보잘 것 없는 긴 직사각형의 신전 속에서 눈에 띄는 게 있었다면 신전 입구 맞은편이었다. 그 맞은편은 어두운 신전 내부에 비해 극단적으로 밝은 빛이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이 신전을 잘 덮어주고 있던 지붕이 갑자기 끝에 가서 끊겨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맞은편 끝부분만 하늘에서 들이치는 별빛이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퍼디난드는 직감으로 저 끝이 신에게 기도를 올려야 하는 곳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신의 뜻에 맞게 꽃 한 송이, 제물 하나 챙기지 않은 채로 신전의 끝으로 향했다. 계단도 없고 화려한 석상도 없는 복도를 끝까지 걸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 단조로운 복도가 오히려 퍼디난드의 마음을 경건하게 만들었다.
지붕 없는 그 끝으로 가서 서자, 퍼디난드를 향해 내리치는 것은 강렬한 빛. 그건 라하가 만들어놓은 별이 내리는 빛이었다. 이스델라의 하늘 중 어디에도 저런 하늘은 없었다. 저렇게 많은 별이 떠 있지도 않았고 그 별들이 그만큼 강하게 빛을 뿜지도 않았다. 그건 거의 폭력에 가까운 빛이었다. 신도들을 단죄하기 위해 내리는 벌 같은 빛. 퍼디난드는 고개를 숙였다. 지금껏 자신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 떠올리기 위해. 대별지기인 그는 라하의 앞에서 누구보다 모범적이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신은 그 죄가 무엇인지 쉽게 알려줄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인간에게 직접 말을 거는 신이라는 건 없다.
퍼디난드는 평소에 라하를 향해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소원을 이루어 주는 건 신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거기다 퍼디난드에게는 소원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욕심을 가진 자는 신의 심부름을 할 수 없다. 그건 알고 있던 그였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욕심을 내게 된 것은, 인간의 평화. 사람들이 잃어버린 일상을 되찾는 것. 대별지기는 이스델라를 재건해야 했다. 그것은 라하의 뜻이기도 했으니까. 퍼디난드는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가득히 떠 있는 별. 인간이 평생을 노력해도 결코 얻어낼 수 없는 삶의 진리. 구태여 비유하자면 퍼디난드는 목동이었다. 길 잃은 양을 보호하는 목동. 그러나 지금은 그 자신이 길 잃은 양이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왜 아직도 재건을 위한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걸까? 내가 역시 대별지기의 자격에 맞지 않아서? 내가 대별지기가 되는 건 라하의 뜻이었을까? 왜 라하께서는 내게 이런 운명을 지어 주셨는가? 운명을 되물어 볼만큼 마음이 약해졌으므로, 처음으로 라하를 향해 목소리를 냈다. 대별지기, 모두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라하께서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러나 하늘은 아무런 답을 해주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고요히 신전 앞을 지나쳤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퍼디난드는 불타는 땅 앞에서 울며 엎드려 있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라하는 말이 없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답을 찾지 못한 그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라하가 그의 질문에 답을 해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퍼디난드는 이름뿐인 대별지기로 남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건 인간의 영역이다. 퍼디난드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스델라의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러자 무력한 자신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았다. 빛나는 대리석을 밟고 있는 초라한 자신의 두 발을. 눈을 감자 저절로 눈물이 떨어졌다. 들어주소서. 저는 그들을 지켜내고 싶습니다.
그건 신을 향한 퍼디난드의 고백이었다. 신의 심부름꾼이 아닌, 인간의 마음이 앞선다는 고백.
눈을 감고서도 사위가 밝아지는 걸 느낀 퍼디난드는 불현듯 눈을 떴다. 그는 신전 앞에서 눈을 떴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해했다. 하늘 위에 떠 있던 별들이 지금, 그를 에워싸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빛은 눈을 멀게 할 정도로 밝은 빛은 아니었으나 퍼디난드에게 신전 밖의 찬바람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온기를 주고 있었다. 퍼디난드는 잠시 머뭇거리며 빛을 잡아볼까 하다 이내 그만두었다. 그건 라하의 뜻이 아닐 테니. 곧 춤을 추던 빛이 천천히 뭉치며 퍼디난드를 향해 모여들었다. 그의 머리를 에워싸며 단단한 형체가 된 그것은 퍼디난드의 몸을 따뜻하게 비췄다. 꽃향기가 났다. 신전 밖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들꽃의 향.
이것이, 라하의 뜻입니까.
큐큣, 그만 일어나라구!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장난스럽게 눈을 찌푸리며 웃고 있는 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건 엔지의 짓이라는 걸.
엔지.
잘 잤어? 큣큐☆.
퍼디난드는 더 말할 기력이 없었다. 집무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되나. 순간, 아직도 코끝에 맴도는 꽃향기 때문에 머리를 만졌지만 손끝에 닿는 건 후드의 감촉이 전부였다. 엔지는, 마치 퍼디난드가 어딜 다녀왔는지 자세히 알고 있으며 거기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세히 기억하고 있다는 눈짓으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절대 신의 뜻을 알 수 없는 법이라고. 그게 대별지기라 하더라도 말이지. 큣큐큣☆.
퍼디난드는 따로 답하지 않았다. 그저 장난기가 심한 악마의 눈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인간은 라하의 뜻을 결코 알 수 없으리. 그러므로 라하가 준 길을 가야 했다. 그의 별빛에 이끌리는 건 인간의 운명이라고 믿으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디언 직속 별지기와의 면담 시간이었다. 엔지는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풋내기 별지기가 문을 열었을 때에는 영문 모를 꽃향기가 집무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꽃은 보이지 않았다. 창문도 닫혀 있었으므로 밖에서 들이치는 향도 아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대별지기는 여전히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늘 끝도 없는 문제들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는 어딘가를 다녀온 듯 맑은 눈으로 웃고 있었다. 믿음이 강한 자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웃음. 퍼디난드가 입을 열었다.
별빛이 그대와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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