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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톡

[첫문장][진공대] 말라가는 새벽의 꿈

by ___hashi___ 2020. 5. 5.

어제의 너를 기억해.

남자는 잠깐 누워서 천장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이 말랐지만 그보다도 담배가 더 급했다. 꿈 없는 잠을 자던 그가 오랜만에 꾼 꿈은 색깔이 없었다. 탁하게 바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꿈처럼 색 없이 창백하게 말라있는 방 안.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군. 남자는 거친 얼굴을 맥없이 쓸어내리고 안경을 꺼내 썼다. 핸드폰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잠깐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고개를 숙였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방에 찌든 담배 냄새를 빼기 위해 침대 맡의 창문을 열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차가운 새벽의 빛 때문에 사위가 밝았다. 담배를 피워 물고 밖을 내다보았다.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혼자였다. 너무나도 혼자여서 피우던 담배를 멀리 던져버렸다. 욕이 나오려는 걸 참고 대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본인이 자처한 일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생각보다 농도 짙은 외로움 때문에 온 몸이 저릿한 건 어찌할 수 없었다.

‘이럴 수도 있었나. 이 나이가 되어서도 이렇게 한심할 수가 있던가.’

남자는 조금 더 밖을 둘러보다 그대로 방 안에 들어왔다. 빛이라도 잘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빛은 생각만큼 얼른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침대에 밀어둔 이불을 대충 정리하고 머리를 긁었다. 남자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건, 방을 나간 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전 주인의 목을 치기 위해 계략을 짜는 것.

그래서 남자는 문 앞에 우뚝 멈춰서있었다.

다시 표정관리를 하고, 문을 열고, 머리를 쓰고... 남자는 주인에게 등을 돌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건 스스로 자신을 세상 밖으로 던져버리는 일이라는 걸. 심지어 다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은 건 그의 치밀한 전략이었다. 그가 선택한 일이었다. 모두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 이루어질 가망조차 없는 이상 하나에만 매달린 세월의 대가.. 그 대가는 색깔 없는 방 하나와 말라버린 마음,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였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 헛웃음을 짓다 구겨진 담뱃곽을 열었다. 하필이면 돗대였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네. 이런 씨...’

이젠 가족의 얼굴마저 기억나지 않았다. 목소리도 떠오르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 했던 짙은 농도의 추억마저 담뱃재에 묻힌 것 같았다. 도대체 뭘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남자는 자신이 끝까지 이상을 놓을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남자는 꿈에서 만난 주인, 등을 돌려버린 주인이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어제의 자신을 기억한다고 말하던 모습.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고, 그러나 눈은 슬퍼 보였다. 전 주인은 이 남자에게 유난히 많이 기대던 사람이었다.

침대 끄트머리에 천천히 새벽의 빛이 밀려왔다. 이제 해가 뜨기 시작했고, 남자는 돗대를 꺼내 물었다. 표정 없는 눈을 안경으로 감췄지만 손끝에는 악에 받친 힘이 남아 있었다.

‘어제의 나? 개소리. 나도 어제의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조맹덕씨. 잘못 생각한 거야.’

남자는 이를 갈며 비릿하게 웃었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이상이 문 밖에, 혹은 문 안에 있었고, 남자의 붉은 눈이 활짝 열렸으며, 결국 문을 열었다. 거의 다 타들어간 돗대를 입에 문 채로.


김박살(@ WlrWlrrnd_xnldj)님이 주신 첫문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