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그루터기에 앉아 발 근처에 핀 민들레를 보았다. 이파리 끝에 작은 빗방울이 걸려 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허공에 떠 있는 무거운 물기는 아직 가시지 않았다. 짧은 숨을 삼키고 그루터기에 앉아 당신이 오기를 기다렸다. 식어버린 하늘 위에 낮게 떠 있는 구름. 나는 원래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니까 얼버무리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닌데 당신은 얼른 오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잠깐 앉아있는 동안 발치에 가까이 다가온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작고 부드러우며 둥근 몸. 고양이는 빈 허공에 붕 떠오르는 민들레를 보며 짧은 다리로 뛰어다녔다.
발을 절뚝이면서.
잠깐 망설였지만 결국 나는 꿈쩍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 번만 품에 안아보고 싶었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것 같은 마음에 조용히 고양이를 지켜보았다. 아마도 다리가 다쳤는지 고양이는 매번 힘겹게 걸었고, 낑낑 소리를 냈다. 어미를 잃은 새끼 같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어미를 찾아줄 수도 없었고 다친 다리를 고쳐줄 수도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주라는 건 누군가의 목을 베는 것, 하나. 가장 크고 강한 자들의 목을 베어온 나는 저렇게 여린 것들이 스러지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온 터였다. 마음을 내려놓았다. 고양이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서.
고양이는 날아다니는 작은 민들레 홀씨를 잡으려 몇 번 폴짝 뛰었다. 조금도 지치지 않고. 다리가 아플 텐데도, 잠깐 발을 털고 다시 뛰었다. 신기했다. 저렇게 여린 것이 뭔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는 저렇게 약하고 작은 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 고양이는 몇 번 더 뛰어오르다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다. 잠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양이는, 제 몸에는 클 법한 웅덩이에 빠져서 몸을 버둥거리고 있었다. 얼른 고양이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젖어 있지만 여전히 따뜻한 몸. 고양이는 얕게 떨면서 조용히 울었다. 잠깐 더 바라보고 있자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난세에는 높으신 분들도 제 자리를 지키기 힘들었고 심지어 목이 날아가는 일도 잦았다. 그러니 이 작은 것들이 저런 수렁을 빠져나오기란 얼마나 쉽지 않을 것인가. 웅덩이 옆에 고양이를 내려놓았다. 나는 당신 생각을 했다. 고양이는 나를 지나쳐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나만 몸이 다쳤지만 당신은 몸 이상의 것들을 벼려내야 했을 것이다.
아우야!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당신이 오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당신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크게 다치지도 않은 내 몸을 보고 걱정을 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몸에 난 흉터를 본다. 어깨에 길게 난 자상을. 지금 팔을 쓰기에 힘들지도 모를 정도로 깊이 난 자상을.
형님, 이건....
아! 걱정하지 마. 이것쯤이야! 근데 뭐 하고 있었어?
아... 고양이가...
나는 뭔가 더 말을 하기가 어색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당신은 내 뒤에서 멀어지는 고양이를 지켜보다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역시! 둘째는 마음이 좋다니까! 모두를 지켜주는구나!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모두를 지켜준 적은 없다. 단지 해야 할 일을 해온 것일 뿐. 당황해 얼른 고개를 젓자 당신은 끄덕이며 웃고 내게서 멀어졌다. 당신은 여단을 이끄는 사람.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저기에 저렇게 많았다.
청룡언월도를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줬다. 당신은 더 많은 상처를 안고 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의 나룻배가 되어 당신을 더 멀리 데리고 갈 것이다. 약한 것들의 손을 오래도록 잡지 못하는 내가 당신의 손을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고양이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당신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것. 모두가 나를 지나치더라도. 변함없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박카스(@ bacchus2718)님이 주신 첫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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