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비록 너를 사랑했어도 그건 진심이 아니었어.
그 아이는 밝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거짓말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았다고? 그건...
아니야.
나는 그 애를 흔들림 없이 보며 말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지?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애는 또렷하게 나를 보고 말했다.
너. 고집부리는 거야.
왜 나를 떠나려고 하는 거야?
정말이라니까. 너를 사랑한 적 없다는 건.
잠깐 얼굴에 스치는 그림자를 내가 못 알아볼 리 없다. 하지만 그 애는, 유리는 다시 밝게 웃었다. 학교 건물 뒤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말없이 손을 잡고 있었다. 더운 여름 바람 때문에 맞잡은 손에서 살짝 땀이 찼다. 나를 좋아한 적 없다고 말하면서 왜 손을 잡고 있는 거야.
나 있잖아. 이제 너랑 말 안 할 거야.
웃기지 마.
진짜야.
유리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이건 다 계략이야. 유리는 학교에 돌고 있는 이상한 소문을 신경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밤마다 내가 사람 피를 빨아먹고 다닌다는 소문. 진짜, 웃기지도 않는 소문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뱀파이어가 어디 있냐? 아니면 뭐, 그렇게 수혈이 급해? 정말, 그런 소문을 믿는 건 아니겠지? 난 야자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피곤해서 바로 자는데 돌아다닌다니 무슨.
야. 그거 다 소문이야.
알아.
유리는 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고집을 꺾을 수는 없는 건가? 우린 잘 지내고 있었잖아. 요즘 공부 때문에 바빠서 데이트는 못했지만. 여전히 유리가 준 머리끈을 달고 있던 나는 결국 자존심을 꺾고 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 나쁜 년.
야. 가지 마.
안돼. 난 진짜라서 가야 해.
뭐가 진짜라는 소리야?
... 이거.
이상하게 자신이 없어진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작은 유리의 손만 보고 있었다. 창백하도록 하얀 유리의 손. 나쁜 지지배. 왜 나를 떠난다는 거야. 그러자, 유리는 내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내 턱 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결국 나는 그 애의 눈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다갈색으로 빛나는 유리의 눈이 핏빛으로, 빨갛게 변했다.
살짝 속이 울렁거렸다.
유리는 얼른 내 손을 놓고 갈게-라고 상쾌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멀어졌다. 다리에 힘이 빠진 나는 주저 물러 앉아 얼른 소문을 떠올렸다. 피를 빨아먹는다고? 유리는 내 체구와 비슷했고 어두운 밤에 얼굴을 잘 못 알아본다면 유리를 나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꽤 비슷하게 생기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가슴 뛰는 사실은 따로 있었다. 그 애가 나를 바라보던 붉은 눈, 그 눈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트친분이 주신 연성 소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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