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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경계

통각잔류

by ___hashi___ 2020. 2. 1.

원래 스토리를 조금 변형했습니다. 변형에 민감하신 분들에겐 죄송, 피해주세요


무통증. 그러나 어쩐지 아픔을 느낄 수 있다. 여자는 어깨를 움츠리고 천천히 걸었다. 발끝마다 저릿하게 스며드는 통증. 배가, 배가 아픈 것이었는데 어쩐지 온 몸이 무너질 것처럼 아프다. 이게 생(生)이라는 걸까. 아픔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인생은 얇은 연기처럼 실체감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단단한 무게를 가진 하나의 生이 되었다. 그러므로, 아프다. 살아있는 것들은 다 아프다. 그걸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잠겨있는 문을 노려보았다. 악으로 여기까지 걸어온 참이다. 그 먼 시간으로부터, 저 끝 복도로부터, 여기까지. 휘어라. 여자는 알고 있었다. 이제 자신은 악귀나 다름 없으며 그런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건 동족이 아니면 없다는 걸. 그리고 그녀와 같은 동족은 통증을 느끼지 못 하는 삶만큼이나 희귀했다.

교실 안에는 삶을 가진, 살아있는 생물이라고는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비어 있는 책상들과 낮은 의자들, 교실 뒷벽의 게시판과 교실 정면에 있는 칠판. 참으로 간결한 교실이다. 사물은 있었으나 사람은 없었다. 죽음을 볼 수 있는 그 여자였다면 여기 있는 이 모든 침묵을 베어냈을까. 통증. 다시 아릿하게 스며오는 통증. 여자는 배를 움켜잡고 생각했다. 그럴 수는 없다고. 애써 얻게 된 이 풍경마저 죽음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고. 여자는 다시 남아 있는 힘을 쥐어 짜 창가로 향했다. 그녀가 중학생 때 매일 앉던 자리로. 다시, 그 교실로 돌아온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느끼지 못 했던 삶을 이제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다시, 이 자리로.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던 자리인 여기로.

여자가 그리워하는 사람은 평범했다. 어제와 오늘의 모습이 같고, 오늘과 내일이 다르지 않았던 사람. 이마를 정갈하게 덮고 있는 까만 앞머리와 뿔테 안경. 하지만 여자는 그 안경 너머에 있던 단정한 눈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픔을 느끼지 못 하는 그녀에게, 삶이 무엇인지 알지 못 하는 이런 반푼이에게 삶의 증거를 남겨준 사람. 여자는 새된 소리를 뱉는 의자를 자리에서 빼내었다. 힘겹게 앉은 채로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힘들다. 단순하게 이렇게 자리에 앉는 것만으로도 이만큼의 힘이 들다니. 왜 내게는 더 많은 시간이 남아있지 않은 것일까? 내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과 이제야 비슷하게 되었는데, 왜 그 사람은 떠나고 없을까? 운동장에 하얀 선으로 그려진 트랙 위에 나무의 그림자가 어렸다. 눈을 감았다. 아직도 운동장 트랙을 건너 걸어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그릴 수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눈을 감고도 그려볼 수 있는 풍경이 그것이 전부일거라 생각했다. 그것 말고 다른 풍경은 가능하지 않다고. 얼마나 많이 바래온 풍경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녀 앞에는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아직도 죽지 않았네. 당신은 오지 않고. 여자는 잠시 울먹였다. 당신은 오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지 못 하겠지.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여자는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단 한 사람만을 간절하게 기다리면서. 그러나 그녀를 찾아온 이는, 그녀가 그토록 바랬던, 눈을 감고도 그 뒷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다.

나이프를 들고 온 그녀의 동족은 교실 문 앞에 서서 여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몇 번을 피를 토하고도 여전히 삶을 놓지 못 하는 저 지독함이란. 하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그렇듯, 살고 싶어 하는 법이다. 여자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이제 울지 않았고 더 이상 눈을 감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삶을 포기할 수 없다. 아픔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아프다고 말할 수 없었던 여자가, 자신의 동족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파요.

여자의 동족은 나이프를 들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알고 있다. 너가 아프다는 건. 그러나, 이제야 알게 되었다니. 

아파요. 너무 아파요.

여자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걸 참으면서, 살고 싶기 때문에 말했다.

아파요.

알아.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그 녀석은 오지 않아.

알아요. 오지 않아요. 하지만 기다리면 안 될까요? 아니, 내가 가면 안 될까요? 그 사람한테 말하고 싶어서요. 아프다고. 너무 아프다고.

여자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늦봄에 꾸는 꿈처럼, 밝고 흐릿한 웃음이었다. 그녀의 동족은 나이프를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칼끝이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찔리기 직전, 여자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파요.

그것은 긴 꿈이었다. 통증을 느끼지 못 한 채로 살아온 기나긴 꿈. 꿈에서 깨어난 그녀는 배에 흐릿한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나가버린 통증. 그러나 여전히 아릿하게 저려오는 통증. 미처 다 사라지지 못 한 통각의 잔류. 여자는 배를 습관처럼 배를 쥐어 잡고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트랙은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