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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트

[안키아] 파랑새의 풍경

by ___hashi___ 2020. 3. 24.

심술궂은 남자가 떠난 빈자리에는 창가에서 밀려오는 햇빛이 나직이 떨어졌다. 살짝 먼지가 날린 것도 같다. 순간, 남자와 말씨름을 하던 여자는 작게 한숨을 뱉고 차 한 모금을 마셨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순전히 마스터에게 줄 생각으로 만든 오하기가 조금 남았길래 가져온 것뿐이었다. 혼자 먹기에는 조금, 많았으니까. 그러다 차까지 마시게 된 것뿐인데, 항상, 그 남자와 말을 시작하면 좋게 끝나지 않았다. 그 남자는 태생이 작가인지라, 사람에 대한 관찰이 뛰어났고,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당사자를 앞에 두고 냉담하게 아픈 부분을 파고들어갔다. 뱉는 말마다 독설이었고, 유달리 예민했으며, 까칠했다. 웬만해서는 상처를 받지 않는 그녀도 그 조그마한 작가가 내뱉는 말이 아프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무신경한 사람. 그러나 알고 있었다. 사실 그는, 무신경한 작자가 아니라 누구보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깊은 남자라는 사실을.

여자는 머리에 드리운 하얀 베일을 어깨 뒤로 넘기고 남자가 주로 쓰는 책상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빛을 뿜으며 켜져 있는 모니터 화면. 펜으로 글을 쓰던 그는 칼데아에 온 이후로 매일 저렇게 컴퓨터 앞에 매달려 있었다. 글을 쓰는 데에는 펜보다 컴퓨터가 효율이 더 좋다는 걸 안 모양이지. 그래도 아직 손으로 쓰던 버릇을 버리지 못한 그는 책상 한 켠에 종이 뭉치와 만년필, 잉크병을 내버려두었다.

흠. 크흠.

여자는 괜히 목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끔 또 다른 작가 선생이 올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더 이상 그 까칠한 작가가 없으니 방을 나가도 상관없었지만 그녀는 괜히 차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정말, 별 수 없는 분이군요.

그렇게 말한 뒤로도 그녀는 잠시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는데도. 그녀는 스스로의 자존심 때문에 일어나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조그마한 호기심 때문에, 그리고 구태여 언급하고 싶지 않은 모종의 감정 때문에 찻잔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여자는 얼마간 더 앉아 있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쓸데없는 소란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하. 저도 참. 한참 모자란 몸이군요. 구제를 위해 힘을 써야 할 때인 것을. 하지만. 마성보살인 제가 맛보지 않은 쾌락이 있다면, 그건... 안 되겠네요?

그리하여 그녀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마성으로 각성한 보살이었으므로, 쾌락의 끝까지 가야만 마음을 놓았다. 직성이 풀린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여자는 작가의 책상으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괜히 붉어진 얼굴 위로 손을 올리고, 몇 번 옆 눈으로 모니터를 흘겨보며, 여전히 주저하며, 그러나 끝내 모니터 앞까지 나아갔다. 마우스 위에 손을 댈 마음까지는 생기지 않았으므로, 그저 한쪽 손을 뺨에 올리고, 의심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모니터가 보여주고 있는 화면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남자가 쓰던 문장을 놓치지 않고 읽었다.

문장이 그리는 풍경이 눈앞에 저절로 떠올랐다.

찌푸려져 있던 그녀의 눈이 풀어졌고, 꽉 잠겨 있던 입은 조금 벌어졌다.

그녀의 달뜬 볼 위로 모니터의 창백한 빛이 떨어졌다. 얼마간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서 있었다. 팔짱을 꼬고 뭔가를 생각하던 그녀는, 한 손을 풀고 마우스에 손을 가져갔다. 조금의 주저도 없이. 그녀가 원했으므로.

오후의 볕이 그리는 그림자가 그녀의 등 뒤로 길게 이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동경하는 꿈을 계속 읽어 나갔다.

푸른 머리의 조그마한 작가가 지켜보고 있는 줄은 까마득히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