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작] 墨香
제비뽑기 합작
장르 : 무협
대사 : 어디서 좀 놀았니 띱때꺄?
낮게 부는 바람에 교복 치마가 흔들렸다. 소녀는 작은 어깨 위에 걸치고 있던 교복 마이를 내려놓았다. 긴 머리를 하나로 높게 올려 묶은 소녀의 하얀 목 위에 시린 달빛이 떨어졌다. 소녀는 알고 있었다. 맞은편에 선 그 남자가 원하는 것은 목이라는 사실을. 남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주황색 헤드셋을 낀 채로 몇 구절의 랩을 읊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헤드셋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하얀 나시티를 입고 있었고 통이 넓은 힙합 바지는 못 봐줄 정도로 촌스러웠다. 까만 삼선 슬리퍼도, 짧게 깎은 스포츠머리도 어느 것 하나 거슬리지 않는 게 없었다. 무엇보다도 야비한 눈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크고 선한 눈. 그러나 표정을 감추고 있는 눈.
소녀는 검을 뽑았다.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골목길. 쓰레기가 널려 있는 골목길의 벽에는 고양이가 지나다니는 그림자가 짧게 스쳐 지나갔다. 남자는 두 손을 주머니에 꽂고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소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가장 강렬한 열망을 위해 이 자리에 와 있다는 사실까지도. 그는 그녀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불나방 같은 어리석음이.
칼끝이 콘크리트 바닥을 긁는 소리가 이어졌다. 칼이 신음을 뱉는 사이, 남자는 몇 번의 스텝을 밟다 등 뒤에 감춰놓은 긴 칼을 뽑았다.
칼이 그리는 선광의 윤무. 소녀는 이를 악 물었다.
스승의 집에 도착했을 때 발견한 것은 소파 위에 앉아있던 목 없는 시체였다. 목이 잘려나간 단면은 정말 칼로 벤 것이 맞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매끄러웠다. 무릎 위에는 그의 잘린 머리가 단정하게 올라와 있었고 두 눈을 빳빳이 뜨고 먼 곳을 보고 있는 엽의 얼굴은 고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체는 머리와 몸이 분리되었을 뿐 곧 일어서서 차라도 한 잔 내어주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 그 손을 살짝 잡자 전해오는 차갑고 뻣뻣한 기운 때문에 소녀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의 스승이 죽었다는 사실을.
협객. 시대에 뒤떨어진 줄만 알았던 그 단어는 여전히 암암리에서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효참(囂斬)파. 검을 쓰는 이들은 몇 개의 파가 나누어져 있다는 소문이 들리곤 했으나 그중 가장 권세를 떨치는 이들은 하나같이 효참파 소속이었다. 효참. 시끄러움을 단칼에 베어낸다는 이름과는 맞지 않는 권세. 그 권세에 들러붙을 실력조차 되지 않는 양아치들은 뒷골목에서 껌이나 씹으며 무수한 짝퉁으로 둔갑했다. 때문에 뒷골목은 시끄러워졌지만 협객들은 양아치를 직접 상대할 정도로 품위 없는 이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돌연 효참파의 수장이 시체로 발견되면서 실용성 없는 유행이 막을 내렸다. 그렇다. 그건 실용성 없는 유행이었다. 지파를 운영할 정도의 자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도저히 쓸모없는 유행.
소녀가 스승을 처음 만난 것은 그즈음으로, 엽은 자신의 주인이었던 효참파의 수장의 목을 벤 참이었다. 칼에 묻은 핏자국이 아직 다 지워지지도 않았다. 자신의 주인을 죽인 협객. 그런 자는 협객으로서 불릴 자격이 없었으나 소녀는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겨우 집에서 도망쳐 나온 그녀가 협객을 알 리가 없었으며 소녀 또한 양아버지를 막 죽이고 나오던 참이 아니었는가.
왜 아비를 죽였느냐.
저를 너무나 학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다고 사람을 죽인 죄가 잊혀질 듯싶으냐.
그는 아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네 손으로 사람을 벤 것은 맞다.
소녀는 자신을 받아줄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남자에게서 물러날 마음은 없었다. 소녀는 자기 앞에 있는 그 남자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몰랐다. 키가 컸고 체격이 괜찮았으며 검을 차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도장의 관장 정도로 생각하기에는 그 매서운 눈매가 너무나도 강렬했다. 그러므로 소녀는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 겨우 중학생이 된 나이의 어린 여자가 뒷골목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그에게서 배워야만 했다. 검을. 그래서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했다.
맞습니다. 제가 그 남자의 목을 베었습니다. 아직도 그를 베던 순간의 감각이 손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두렵습니다. 다시는 누군가를 베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합니다.
너의 나약함을 베어내겠다는 것이냐.
소녀는 말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주먹을 쥔 손은 핏줄이 서다 못해 하얗게 변해버렸다. 스승의 말은 옳았다. 나약함을 베어내겠다. 그건 소녀가 결심한 유일한 목표였다.
네.
짧은 대답을 끝으로 입을 다문 소녀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무릎을 꿇고 앉아 조용히 소리를 삼켰다. 아버지에게 맞아서 비틀린 오른팔은 힘없이 땅바닥에 늘어뜨려져 있었다. 말없이 소녀를 지켜보던 엽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런다 한들 네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것들을 죽였느니라. 지금도 죽이고 오는 길이지. 칼끝에 묻은 핏자국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칼로 벤 목숨이란 단 하나, 처음 사람을 죽였던 그 날의 희생자였느니라. 기억하거라. 사람은 태어나서 다른 누군가를 단 한 번만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소녀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답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엽 또한 그녀가 자신이 한 말을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대신 엽은 소녀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엽의 밑에서 검을 배우며 소녀는 점차 ‘협객’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갔다. 날쌔게 몸을 날릴 줄 알았고 기습하는 법을 배웠으며 적의 숨을 단칼에 끊어내는 법까지도 배웠다.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지는 확언할 수 없었으나 적어도 혼자서 가짜들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실력이 되었다. 아비로부터 받은 폭력 때문에 비틀린 팔은 끝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고 소녀는 검을 두 손으로 잡기 버거워했다. 그러나 검을 포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말을 듣지 않는 오른손을 억지로 썼고 나중에 스승은 오른손을 쓰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 조언했다. 그러나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 팔 한쪽까지 쓸 수 없게 된다면... 소녀는 그저 자신이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소녀는 스승과의 결투에서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매번 검을 놓치는 어이없는 실수를 하거나 등 뒤를 살피는 데에 허술했고 스승에게 허를 찌르는 공격을 던졌어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날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저절로 알아서 날아오르던 날이었다. 소녀가 뻗은 팔 끝에서 짧게 검이 울었고 실수 없이 스승의 날카로운 검을 막아내었다. 등 뒤를 스치는 예리한 공격도, 일부러 손목을 노리는 술수도 피했다. 몇 번의 칼부림 끝에 스승을 멀리 밀어낸 소녀는 잠시 숨을 고르며 얼른 자세를 재정비했다. 이제는 그녀가 달려가야 할 차례였고 엽은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도장에서 칼끝이 가르는 고요함을 온몸으로 느끼던 소녀는 금세 뛰어올랐다. 스승은 소녀의 날카로운 공격을 옆으로 살짝 피하고 높이 검을 들어 올렸다. 은빛의 큰 호가 허공을 갈랐으나 소녀는 피하지 않았다. 불편한 오른손을 뒤로하고 왼손 하나로만 잡은 검이 스승의 검을 쳐내고 얼른 그의 머리를 향해 내달렸다.
그래 봤자 스승의 볼에 작은 생채기를 낸 것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스승은 그것만으로 만족한 것 같았다. 검을 내려놓은 스승은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는 제자를 보며 말했다.
이제 너에게 줄 때가 온 것 같구나.
소녀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연습용으로 쓰던 무게 없고 자기주장이 강한 시끄러운 검을 쓰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온 것이다. 스승이 검을 내어줄 차례였으니까.
철 지난 유행이 되어버린 협객은 효참파의 해체 이후로 사람들의 입에 잘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엽은 자신이 다시 검을 뽑아야 할 날이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소녀 또한 항간에 떠도는 무수한 소문들을 마주하며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했다. 스승인 엽이 효참파의 우두머리를 베었다는 말은 거의 정설이나 다름없었고, 살아남은 효참파의 실력자들이 엽의 머리를 노리고 있다는 말이 들렸다. 그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이는 한량 같은 젊은 얼굴의 남자라는 사실도. 껄떡대고 힙합을 겉멋으로 배워 효참파의 어느 누구도 그를 진지하게 대하지는 않으나 막상 실력은 엽과 비등하다는 소문까지도. 어떤 것은 심각할 정도로 과장이 섞여 있었고 또 어떤 것은 과장이 아닌 진실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흩어진 강자들은 다시 모여들고 있었고 그러나 엽은 소문에 대해 한 마디도 말이 없었다. 효참. 시끄러움을 베어내는 침묵의 지파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엽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녀는 엽이 죽는 날까지 왜 그가 우두머리를 죽였는지 알지 못했다. 왜 그렇게 적이 많아야 했는지. 소녀는 어느 것 하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상이 감추어놓은 진실은 얼른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스스로의 나약함도 베어내지 못했으나 스승이 죽은 지금, 이제는 그녀가 스스로 찾아야 했다. 엽이 침묵 속으로 가지고 간 진실을. 그녀는 스승의 적을 자신의 적으로 만들고자 결심했다. 그녀는 스승이 옳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은 태어나서 단 한 명만 죽일 수 있다. 그건 엽의 말이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스승님, 저는 한 명을 더 죽일 것입니다.
엽을 땅에 묻은 날, 소녀는 물려받은 검을 꺼냈다. 자신의 손으로 지아비를 죽인 날도 이만큼 슬프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게 엽은 스승 그 이상이었다. 사실상 그는 그녀의 아버지였다. 잃지 말아야 했던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나자 소녀는 목놓아 울기를 그치고 검을 뽑았다.
정치적인 동기 같은 것은 몰랐다. 남자가 무엇을 원하든 어차피 이룰 수 없으리라 생각했으므로. 그는 오늘 소녀의 손에서 죽을 운명이 아니던가. 하지만 남자는 듣던 대로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맞부딪히는 검의 울음 끝에 잠깐의 여유가 생기면 쉴 새 없이 랩을(랩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를 어설픈 라임을) 뱉었다. 어쩌면 그가 하고 싶은 것은 효참파의 새로운 우두머리가 아닌 쇼미더머니의 우승자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껄떡대는 그 가벼운 남자의 재빠른 몸놀림을 도저히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남자는 과연 소문대로 노련했다. 하지만 소녀는 그의 공격을 막아낼수록 미궁 속에 빠지는 느낌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정말 이 남자가 엽을 죽였단 말인가?
이 남자가, 랩이 흘러나오고 있는 헤드폰을 한 번도 벗지 않는 이 남자가 강자라는 것은 알 만했다. 공기를 가르는 칼의 울음을 듣지 않는다는 건 그만한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고 가벼운 듯해도 효참파의 새로운 우두머리를 노리는 자로서의 명성에 걸맞게 검술은 무섭도록 고요했다. 쓸데없는 멋을 부리지 않았고 동작에는 사실상 군더더기가 없었다. 몸을 낮춰야 할 때는 소리 없이 눈앞에서 사라졌고 상대에게 조금의 빈틈도 주지 않고 무겁게 검이 한 획을 그으며 달려왔다. 그러나 부족했다. 그녀의 실력으로는 너무나도 넘치는 실력자였지만 스승을 죽이기에는 한끝이 부족한 실력이었다.
빛나는 달 아래에서 짧은 소음이 스쳐 지나갔다. 공사차가 내는 무거운 소음이 두 사람의 칼 소리를 삼켰다. 잠시 주춤 물러나 숨을 고르던 소녀는 여유롭게 리듬을 타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공격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여유로움. 소녀는 불편한 오른팔에 힘을 줬다. 맥이 풀렸다. 저 남자를 상대할수록 깨닫는 것이 있었다면, 그건 저 남자가 스승의 원수가 아니라는 사실.
누가 스승님을 죽였지?
소녀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뒷골목에서 도는 소문을 전부 믿으면 안 됐는데. 소녀는 자신의 미숙함을 탓하며 검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망설였다. 일단 뽑았으니 뭔가 베기는 해야 할 텐데, 눈앞의 상대는 진지하게 자신을 대해 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애초에 저 한량이 엽을 찾아간 일조차 없을지도 몰랐다.
왜? girl. 갑자기 덤빌 마음이 사라졌니? hey. 아무것도 모르고 오다니, Are you kidding me?
소녀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검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빠졌다. 저런 놈을 상대하려고 여기까지 왔다니. 무엇보다도 상대를 잘못짚었다는 사실에 아연했고 그렇다면 정중하게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벅찬 상대와 검을 겨뤄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사과를 위해 검을 바로 세우려던 소녀에게 남자는 한 손을 들어 올리더니 검지 손가락을 세우고는 양 옆으로 흔들었다.
쯧. girl. 그렇다고 검을 치우다니, yo, 과연 young lady. 내가 그날 엽을 보러 간 건 맞다고. but.
이젠 랩이라고, 아니 라임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쇼미더머니는 고사하고 고등랩퍼에도 나갈 수 없을 실력인데. 소녀는 눈을 찌푸리고 침묵하고 있는 허공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남자는 선하고 맑지만 많은 것을 감추고 있는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갔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지.
알고 있었다. 그랬을 것이라는 사실은. 깨끗하게 목이 잘린 단면. 정말 검으로 벤 것이 맞는가 싶은 깔끔하고 조용한 뒤처리.
소녀가 알기로, 그건 엽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불안했다.
남자는 빙긋 웃으며 등에서 꺼낸 큰 대검을 여유롭게 흔들거렸다. 얼굴을 까딱이던 남자는 가벼운 태도로 말을 이었다.
girl. 수장은 누가 벴을까? 이젠 눈치챘겠지? yes, 엽이 그랬gi. 어쩌겠으? 우린 침묵해야 하고 수장은 시끄러운걸.
소녀는 말을 삼키고 남자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생각했다. 본래 수장이었다는 작자가 정치인들과 결탁했었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러니까, 효참파의 타락을 막기 위해 차라리 효참파를 없앴다는 말인가? 수장을 죽임으로써?
엽은 결국 적이 늘었지. 그리고 적들은 모두... die. 알지? 엽을 이길 수 있는 협객은 없지. yeah. 나도 마찬가지.
이번엔 제법 라임이 맞았다.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남자는 아랑곳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but. 자꾸 나오지 뒷말, 자꾸 날뛰지 짝퉁, 자꾸 덤비지 객들. 결론은 무엇?
소녀는 말없이 남자의 눈을 노려보았다. 검을 든 손이 떨리는 걸 느꼈으나 진정할 수가 없었다. 협객. 철 지난 유행이자 단어. 냉정하게 말하면 뒷골목의 사람이 아닌 이상 협객에 대해 진지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뒷골목의 양아치들도 협객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검술만이 진실인 집단이 분명 있었고 소녀는 자신이 물러날 곳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설프게나마 협객이 된 지금, 그녀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애초에 사람들이 말하는 ‘평범한 일상’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맞닥뜨려야 했다. 스승이 내린 결론을.
그녀가 겨누는 칼 끝에 선 남자는 처음으로 헤드셋을 빼고 말했다.
자살이라는 거지. okay?
생각하지 못했던 남자의 말에 소녀는 잠깐 뒷걸음질을 쳤다. 주춤대는 발걸음 뒤로 긴 그림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랬다. 남자의 예상대로 그녀가 원하는 것은 여기에 없었다. 그녀가 죽여야 하는 원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소녀도 알고 있었다.
스승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란 없다.
내가 갔을 땐 늦었지, 이미! yo, understand? 쯧, 형님. 너무 높은 이상? 변해 버린 망상. 그냥 두목 하시라니깐... but... oh, girl! 짭새들이 뛰어다니는 바닥! 튀어야지 얼른!
소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금세 이 근방에 도착한 것이다. 경찰이. 스승의 바람과는 다르게 효참파는 다시 세를 불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경찰은 검을 쓰는 무리가 생겨나는 것과 같이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효참파가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듯. 남자는 높이 뛰어올라 담장을 넘었다. 손을 활짝 펴고 인사를 하며. 방긋 웃고 있었다. 남자는 처음부터 그녀를 죽일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에 소녀는 모욕감을 느꼈다.
길게 사이렌 소리가 이어졌다. 좁은 골목 사이로 붉은 헤드라이트 빛이 비쳐 들었다. 젊고 피곤한 얼굴 기색의 경찰이 걸어 나왔다. 키가 컸고 볼품없었다. 다른 한 명은 나이가 들고 작았으나 젊은 쪽보다는 노련해 보였다. 협객. 무림의 고수들. 오래도록 이어지는 지파의 싸움 속에서 살아남는 강자들. 그러나 소녀는 검을 내려놓고 싶었다. 태산같이 굳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스승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던가? 그것도 자신의 망상 때문에.
야. 뭐 하는 거야. 얼른 나와. 시발, 할 일도 많은데. 하여간 발랑 까진 애새끼들이란.
학생이니까 욕하지 마라.
두 경찰이 주고받는 대화에는 피곤함과 권태가 잔뜩 끼어 있었다. 예리한 협객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 소녀는 얼른 몸을 돌려 젊은 경찰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너무, 시끄러워. 혀를 씹으며 뒤로 물러난 경찰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디서 좀 놀았니 띱때꺄?
웃기지도 않는 말투. 혀를 씹었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이 젊은 풋내기보다 위험한 건 뒤에 버티고 서 있는 노련한 남자였다. 풋내기는 그 후로도 몇 번 비틀거렸으나 제대로 일어설 수는 없었다. 간간히 순찰을 도는 경찰이 무림의 거친 고수를 상대하던 그녀를 이길 수는 없었다. 몇 번의 헛도는 공격을 막아낸 소녀는 정확하게 남자의 등을 가격했다. 지켜보던 상사는 상대하기가 조금 더 어려웠으나 마음이 차분해진 그녀의 주먹이 조금 더 빨랐다.
두 경찰은 죽지 않고 기절해있었고 소녀는 자신이 지금껏 아비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죽여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녀는 조용히 스승을 떠올렸다. 그가 걸어야 했던 길이 얼마나 외로웠던 것인지 그제야 헤아리면서. 결국 그녀도 그 꼴이 나지 않았는가? 스승이 그랬듯 그녀 또한 경찰을 소리 없이 죽인다면 일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차라리 그게 더 나을 것이다. 기회는 지금 뿐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검을 칼집 안에 넣었다.
사람은 태어나서 단 한 명만 죽일 수 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스승은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스승이 기억하는 살인이란 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경찰을 살려준 지금, 이젠 정말 피할 수가 없었다. 경찰을 폭행했으니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법 안에서 안전한 이들은 그녀의 적이었고 효참파의 강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도 이젠 스승이 걸었던 길을 밟아야 했다. 사람들을 피해야 했고 그러려면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했다.
소녀는 자신에게 단 하나의 방법이 남아 있다는 걸 알았다.
칼집 안에 넣었던 검을 다시 뽑았다. 스승처럼 목에 칼을 찔러 넣을 수도 있었으나 그녀는 그만한 이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살고자 하는 욕망이 더 강했다.
은빛으로 빛나는 호가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 붉은 피가 솟구쳐 오르던 자정, 소녀는 한 번도 도움이 되지 못했던 오른팔을 잘랐다.
피가 흐르는 팔의 단면을 보자 엽을 떠올렸다. 목이 잘려 있던 단면. 매끄럽고 고요한 단면. 그녀가 잘라내 환히 드러난 팔의 단면 또한 마찬가지였다. 곧 들려오는 날카로운 웃음소리. 그 남자였다. 역시. 지켜보고 있었군.
소녀는 뒤돌아 가야 할 길을 걸었다. 차가운 달빛이 그녀의 목덜미에 훤히 떨어졌다. 걸을 때마다 시멘트 바닥에 떨어지는 피가 검붉게 빛났다. 남자의 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이제 가장 강한 자가 되고자 했다. 스승까지 뛰어넘는 가장 강한 자. 단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살아가기 위해. 시끄러움을 가르는 무거운 한 획. 가장 거추장스럽던 약점까지 잘라냈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검의 이름은 요참도. 높게 올려 묶은 소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짧게 흔들렸다. 아직 떠나지 않은 남자의 검이, 그녀가 상대해야 할 가장 큰 적수가 당장 등 뒤에 서 있었다. 소녀는 셔츠 소매로 자른 팔을 질끈 묶고 자세를 정비했다. 왼손으로 검을 들어 올리고 눈을 감았다.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예리하게 빛나는 검. 그림자를 베는 검 끝에 묻은 묵향. 숨소리마저 삼키는 달빛 아래의 윤무. 소녀는 검의 뜻을 조용히 되뇌었다.
번뇌의 한가운데에 가장 고요한 묵자가 되리라.
조졌어요! 아주 조졌어요!ㅎㅂㅎ! 와족피떡 합작 이번에 진짜 어려웠다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