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톡

[소원권][주공근] 땅 위를 보는 눈

___hashi___ 2020. 5. 22. 22:57

남자는 흘러내리는 긴 머리칼을 뒤로 넘기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는 얼룩진 낙엽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남자는 조용히 혀를 찼다. 그는 친구가 제시간에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 누군가를 돕거나 쓸데 없는 싸움에 휘말렸겠지. 잠깐 고개를 젓다 못 이기겠다는 듯 웃고 말았다.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보기 드물게 똑똑하며 자긍심 또한 높은 자신이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좀 더 잘 알아준다면 좋을 텐데. 남자의 친구는 쉽게 위험 속으로 뛰어들었고 가장 강한 자들과 곧 잘 맞부딪히고는 했다. 남자가 원하는 것은 그의 친구이자 주군의 이름이 천하에 드높아지는 것. 그러나 천하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멀었다. 남자는 마음이 조급했지만 친구는 그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주군은 신하들이 걱정하는 일을 벌이고 다니는 것이다. 제 명을 줄이는 일을.

바스락 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얼마간 더 걷던 남자는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차가워진 공기. 가을이었다. 입고 온 코트를 여민 남자는 잘생긴 얼굴을 훤히 드러내놓고 하늘을 날아가는 작은 새 한 마리를 지켜보았다.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호수 위를 짧게 스쳐 지나가는 그 모습. 갈빛의 깃털을 몸에 가득 두른 그 새는 통통히 오른 살집을 자랑스레 여기기라도 하는 듯 호수 위에서 잠깐 뒤뚱거렸다.

그러나 새는 곧 힘차게 날아올랐다. 생각해보면 그의 친구도 다르지 않았다. 호수 위에서 뒤뚱거리던 새는 몸집이 작았고 그의 주군은 당당한 체격의 남자였다. 그러나 그의 주군도 그 작은 새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망설이지 않고 활강할 줄 알았고, 젊은 혈기 때문에 실수를 할 뻔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결국 항상 날아 올랐다. 강동의 호랑이. 소패왕. 남자는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 자신의 친구가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에 은근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를 그 자리에 올려놓은 사람 중 하나가 자신이었으니까.

비상하게 머리가 좋은 남자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언제쯤 연락이 올지 가늠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연락이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무작정 급하게 뛰어 와서, 미안-! 하고 말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새는 너무 가볍지. 날아간다면 매처럼 날쌔고 무겁게, 아니, 호랑이라는 별명 그대로 땅을 짚고 있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패왕은 땅 위를 걸어야 할 테니.

남자는 오히려 새처럼 날아야 하는 것이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잠깐 우뚝 섰다. 더 먼 하늘 위에서 널리 꿰뚫어 보는 것. 그것이야 말로 그가 이루어 내야 하는 미래였다. 충분히 똑똑한 그에게는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을 구태의연하게 설명하는 글이 그에게 도움이 될 리 없었다. 남자는 친구처럼 야심이 컸다. 신중하게 상황을 살폈고 더 큰 미래를 향해 발을 뗐다. 남자는 날아올라야 했다. 소패왕, 강동의 호랑이를 위해서. 그의 시야를 더 넓혀주기 위해서. 그것이 이 남자의 방식이니까.

조금 답답했던 마음이 풀린 남자는 다시 자신감에 찬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서늘한 바람이 불었지만 춥지 않았다. 먼 길의 끝에서 다급하게 친구가 달려오고 있었다. 아직 철이 들지 않은, 그 호랑이가.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다짐했다. 언젠가는 친구와 함께 천하를 움켜쥐고 말겠다고. 아름다운 얼굴을 당당히 들고 붉은 눈을 번쩍이며 남자는 친구를 향해 쏘아붙였다. 한심함, 짜증, 피곤함, 귀찮음, 그리고 충정과 가장 깊은 애정을 담아.

뭐야. 손책. 뭘 하느라 날 기다리게 만드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