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톡

[소원권][순문약] 맑고 환한 곳으로

___hashi___ 2020. 5. 15. 02:51

남자는 꽃병 가득히 피어 있는 노란 튤립을 지켜보다 잠깐 코끝을 만졌다. 창을 가볍게 때리는 빗소리를 듣던 남자는 아늑한 소파에 몸을 파묻고 얇은 담요를 끌어 무릎 위에 덮었다. 맑은 눈으로 잠깐 튤립을 바라보던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입구가 좁은 호리병 모양의 유리꽃병에는 물이 가득 담겨 있었고 병에 비해 줄기가 너무 긴 튤립은 어색하게 휘어져 있었다. 잠깐 고민하던 남자는 꽃집 주인에게 들었던 말을 기억해내고 얼른 화병에서 튤립을 꺼냈다.

‘내 정신 좀 봐.’

고개를 숙이고 빗소리를 듣던 남자는 얼른 안경을 고쳐 쓰고 가위를 가져왔다. 가는 줄기 끝을 사선으로 잘랐다. 튤립향. 매일 의자에 앉아 공부를 하던 남자는 튤립에도 향이 난다는 건 알지 못했다. 책에 있는 내용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던 때도 있었다. 배운 대로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더 나은 세상이 올 거라고 믿던 때도 있었다. 남자는 입가에 도는 엷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참. 미련하기도 하지.’

꽃집에서 받아온 튤립은 줄기 끝이 반듯하게 잘려 있었다. 꽃집 사장은 물에 담그기 전, 줄기 끝을 사선으로 자르라고 알려줬다. 그래야 꽃이 물을 더 많이 먹을 수 있다고. 작은 탁자 위에 신문지를 펼쳐놓고 줄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똑- 똑- 소리가 날 때마다 신문지 위에 잘린 줄기가 힘없이 떨어졌다. 유리 화병에는 설탕을 부었다. 영양을 줘야 시들지 않고 오래간다고 들었다. 남자는 화병에 부은 설탕을 녹이면서 잠깐 창밖을 바라보았다. 낮게 눌려 있는 구름 틈으로 얇은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여전히. 꺾인 꽃도 마땅한 양분과 적당한 조건만 맞으면 시들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이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맞지도 않는 꿈을 꿨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큰 꿈을 꾼 것 같다는 회의감. 주군과 약속했던 시간은 머지않았는데 금방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끔 기웃거리며 지나친 꽃집을 오늘 구태여 들렀던 것은, 노란 튤립이 예뻤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고 활짝 피어 있는 튤립. 꽃들 사이에서 단아하고 또렷하게 피어 있던 튤립. 남자는 지금의 자신을 잠깐 타박했다. 얼마나 약해져 있는가 하며.

정리한 화병을 잠깐 바라보았다 괜찮은 것 같았다. 신문지를 치우고 제대로 탁자 위에 올려놓자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비가 그친 창밖으로 비릿한 물 냄새가 흘러들었다.

핸드폰을 확인하자, 주군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남자는 멍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얼른 채비를 했다. 주군을 배신하고 떠난 책사가 있었다. 남자는 그 사람과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를 잊지 않고 있었다. 책사는 주군을 바꿀 수 없다고 말했고 남자는 주군을 꼭 성군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바른 길로 이끌겠다고.

‘그렇게 말해놓고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남자는 자신이 옳은 선택과 옳은 판단을 하길 바랬다.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주군을 성군으로 만드는 선택을 하기를. 그래서 망설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지만, 여전히, 구두를 고쳐 신을 때까지, 남자는 답 없는 침묵 속에서 질식할 것 같았다.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건 꽃병 안의 튤립. 맑고 환하게 피어 있는 튤립.

‘... 가야지. 망설이지 말고.’

겨우 회의감을 밀어낸 남자는 집을 나섰다. 남자는 몰랐지만, 그에게선 은은한 튤립 향이 났다. 맑은, 또렷하게 핀 튤립향. 꺾여도 시들지 않는 튤립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