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톡

[소원권][원소/유비] 작은 뱀의 그림자

___hashi___ 2020. 5. 14. 21:10

까맣게 밀려오는 밤의 그늘. 원본초는 넓은 접대실에 앉아 뽀얀 크레마가 올라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유현덕은 제대로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 대신 허리를 펴고 긴장한 눈으로 원본초를 바라보았다.

작은 테이블에 올라온 커피는 거의 다 식어가고 있었다. 원본초는 눈을 감고 가볍게 생각을 짚었고 유현덕은 차분히 숨을 골랐다. 테이블에는 구리로 만든 열쇠 하나가 놓여 있었다.

my... my...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군요?

아, 아닙니다.

왜 편히 드시질 않으시는지?

아, 예. 커피 감사합니다!

유현덕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커피를 마실 마음은 들지 않았고, 잠깐 차를 홀짝이는 척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고요한 접대실의 창문에는 무거운 커튼이 내려와 있었고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상황에 대한 계산이 빨랐고 고요한 침묵이 오래도록 이어지게 둘 만큼 머리가 나쁜 자들은 아니었으므로 금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서주와 기주의 근황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가볍게 헛도는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집요하게 진심을 털어놓지 않았고 그러나 둘은 서로를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천하를 눈앞에 둔 원본초가 먼저 말을 꺼냈다.

anyway, 솔직하게 말씀해보실까요? 열쇠 말입니다. 필요하지 않으실까요?

그러나 그가 상대하고 있는 남자 또한 천하를 꿈꾸는 사람. 가난한 이들의 신임을 얻고 험한 길만 골라서 걸어온 사람이었다. 유현덕은 테이블 위에서 빛나는 열쇠를 아직까지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몇 번 커피를 홀짝이는 동안 끈질기게 원본초만을 보았다. 물론 그 열쇠를 갖고 돌아간다면 당분간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현덕은 아직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핀치에 몰려 있는 것도 아니었고 사람들이 보여준 믿음을 뿌리치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그가 원본초와 손을 잡는다면 얻을 수 있는 건 많을 것이다. 안정적인 버팀목이 필요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열쇠를 갖고 돌아간다는 건 원본초의 밑에 있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드럽고 자애로운 얼굴 뒤에 어려있는 그 남자의 야망을 모르지 않았던 유현덕은 결국 열쇠를 보지 않았다. 원본초 또한 알고 있었다. 이 남자가 쉽게 열쇠를 잡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그러나 끝내 열쇠를 잡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마음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하지만 어찌 저 같은 작은 사람이 이 열쇠를 감히 잡겠습니까. 불러주신 것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oops. really? 작은 사람이라니, 너무 겸손하시군요.

아니요! 오히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른 서주를 돌봐야 해서요. 죄송하지만 일어나겠습니다.

무례하지 않았고, 과하지도 않았다. 유현덕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하게 고개를 숙였다. 커튼 너머에서 잉크처럼 번지는 밤의 빛깔이 비쳐 들었다. 잠깐 멍하니 열쇠를 바라보던 원본초는 살짝 미소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편안한 악수를 나누었고 원본초는 끝내 그 뱀 같은 남자를 얻을 수가 없었다. 제 덩치에 맞지 않는 코끼리를 탐내는 우스운 뱀. 과연 뱀답게 신중했고 치밀했으며 간사했다. 하지만 그래서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접대실에 혼자 남은 원본초는 다시 자리에 앉아 신경을 쓰느라 무거워진 몸을 푹신한 소파에 기대고 빙긋 웃었다. 흰 탁자 위에서 초라하게 빛나고 있는 구릿빛 열쇠. 원본초는 열쇠를 집어 들고 창을 향해 걸어갔다. 커튼을 열자, 보이는 건 저 멀리서 밝게 빛나는 몇 개의 별들. 드물게 떠 있는 별을 향해 열쇠를 들어 올렸다. 어쩌면 얻을 수 없는 것이어서 더 가치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창밖으로 멀어지는 유현덕의 그림자를 향해 짧게 손 인사를 했다. 길고 아쉬운 응시를 남기며.


유비가 의탁하지 않은 if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