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톡

[소원권][주공근] A Gallant Gentleman

___hashi___ 2020. 5. 13. 20:47

 

https://www.youtube.com/watch?v=fYgT7K6bSVU

남자는 긴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기고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은 여전히 까맣게 잠들어 있었다. 남자는 짧게 혀를 차고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주인이 금방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여간, 어디서 또 사고 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일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잔 남자는 잠깐 눈을 감고 뻐근한 어깨를 주물렀다. 그의 친구는 유명했고 동시에 사고도 많이 치고 다녔다. 잘 제어가 되지 않았지만 정의로웠고 적이 많은 만큼 그의 팬도 많았다. 그래서 걱정이었다.

‘그러니까 조심해야 하는데. 걘 그런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하지. 죽어도 안 죽는다니. 누가 그런 말을 믿어.’

남자는 짧게 숨을 뱉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코끝에 밀려오는 약한 먼지바람 냄새. 언제까지 이렇게 머리 아픈 생활을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그래도 남자는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큰 미래를 위해 머리를 쓰는 일을 더 좋아했다. 그게 소중한 친구를 위한 일이라면 더욱 그랬다.

잠깐 사납게 밀려오는 생각의 꼬리를 쫓던 남자는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넓은 바다. 남자는 시리도록 푸르게 빛나는 수평선 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땅 위에 앉아서 손차양을 했다. 작열하며 내리꽂는 볕. 바다 위로 하얀 거품을 길게 그리며 멀어지는 작은 그림자가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림자의 끝을 쫓았다. 그건, 배였다. 크지도 않은 돛을 억지로 붙여 놓은 배. 배는 몇 번 파도에 기우뚱거리며 넘어지려 했지만 우뚝 선 채로 앞으로 나아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항해하기에는 너무 작은 배에 남자의 친구가 타고 있었다. 크고 단단한 등을 훤히 드러낸 익숙한 뒷모습을 보자 남자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지만 그건 어쩌면 그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어딜 가는 거야, 미쳤어?'

“야! 손책! 돌아와! 어딜 가는 거야?”

그러나 남자의 친구는 끝내 대답이 없었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푸른 바다 위로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을 지나치는 크고 단단한 등. 남자는 멀어지는 친구를 향해 달려갔다. 종아리까지 물이 차올랐고, 순간 우두커니 멈춰 섰다. 순간, 남자는 친구를 놓아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뜨거운 모래 바람이 불자 남자의 붉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남자는 한 번도 친구의 손을 놓았던 적이 없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살지 않았고, 친구의 오른팔로 살았다. 친구의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뜻을 가슴에 아로새겼고 친구의 곁에서 가장 큰 힘이 되어줬다.

그러나 친구는 떠나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서 눈물을 흘렸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 친구의 그림자를 쫓던 남자는 아주 잠깐, 그럼에도 그의 오른팔이 되어주겠노라고 다짐했다. 그가 떠나도 그의 오른팔이 되어주겠노라고.

눈을 뜨자, 보이는 건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막사 안.

‘꿈이었나.’

남자는 거칠게 눈을 비비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친구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금방 돌아오겠다는 연락. 남자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로... 유쾌한 꿈은 아니었지만... 꿈이잖아. 일을 해야지.’

남자는 거울 앞에 서서 몸을 가다듬었다. 살짝 비뚤어진 넥타이를 고쳐 메고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했다. 유려하고 잘생긴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아도 마음이 풀어지지는 않았다. 멀어지던 친구의 뒷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워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얼른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금은 꿈속의 친구에게 붙잡혀 있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친구는 현실 속에 있었고, 지금 돌아오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다. 친구가 패권을 잡는 것. 그것이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꿈이 많은 신사는 냉정했고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 깨닫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 사람과, 손책과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보내주리라. 그래도 나는 여기서 너의 오른팔로 살겠지만.’

막사 사이를 훑고 가는 먼지바람에 마른 풀잎이 흔들렸다. 긴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