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문장][조맹덕] 모춘의 그늘 아래
봄이 저무는 모춘이었다.
얼마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발밑의 흙바닥이 금방 파였다. 신발에 자국이 남는 건 끔찍하게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제는 비가 내렸고 벚꽃은 고개를 숙이고 져버렸다. 그늘을 따라 늘어선 벚나무 밑에는 진 꽃잎이 눈처럼 내려앉았다. 이제 곧 있으면 더운 계절이 올 테고 사람들은 옷을 갈아입을 것이다.
그전에, 끝내야 할 것도 많이 남아 있었지만.
남자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길게 뻗은 길을 얼른 걸었다. 돌겠네. 뭔 인간들이 이렇게 말이 많아? 연주의 주인도 되었고 기반도 다지는 중이었다. 맞아. 다 잘했다는 건 아니야. 그래도 그만한 노력을 들인 이유를 알기나 하는지. 그건 낯짝이 뻔뻔하다는 말로 다 할 수 있는 생각의 흐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아직 화를 내는 중이었고 신발이 자꾸 진창에 빠지는 느낌에 도저히 화가 풀리지 않았다. 얼마간 더 걷다 우뚝 멈춰 섰다. 그 개짓거리들을 하고도 내 편이 있으리라 믿었느냐고?
거의 다 진 꽃잎을 밟고 선 남자는 고개를 쳐들고 헛웃음을 참았다. 뒷목이 뻐근하게 아팠다. 이제 곧 여름. 남자는 져가는 봄의 그늘 아래에서 화내기를 그치기로 했다. 더 화를 내서 무엇하겠는가? 어쨌든 그다음으로 나아가는 일에 신경을 쏟기에도 바빴다. 정확히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똑바로 보기가 아직 두려웠던 것이지만. 남자는 눈을 감고 머리를 식히다 얼른 목을 가다듬었다.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가만히 손을 뻗었다. 나무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피어 있는 몇 개의 꽃잎이 떨어질까 싶어서. 오랜만에 맞는 늦은 봄바람이 남자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떨어지는 것은 나뭇잎에 매달려 있던 빗방울. 하. 그럼 그렇지.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속이 쓰렸다. 하늘은 무심하기도 하지. 그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너무 멀리 있었다. 권력도, 명예도, 가까운 이들의 인정도. 뻗었던 손이 민망해 얼른 주먹을 쥐었다. 남자는 자신의 작은 몸에 세상을 담기가 전혀 버겁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버거울 틈이 없었다. 그럴 틈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있을 때면 자꾸 떠오르곤 했다. 과거에 두고 온 너무 많은 것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가질 수 없던 것들이. 돌아간다 해도 다시 붙잡을 수 있을까?
그럴 리가.
남자는 짧게 혀를 차고 씁쓸하게 웃었다. 알고 있었다. 손에 쥐려 할 때마다 빠져나가던 그 많은 것들. 철야를 하느라 거칠어진 얼굴을 쓸어내리고 다시 안경을 고쳐 썼다. 가야지. 발밑에 깔린 꽃잎을 밟으며 주머니에 넣은 손에 주먹을 쥐었다. 어쩔 수 없다. 다시 잡을 수 없다면 앞을 보는 수밖에. 내가 천하를 저버리더라도, 천하가 나를 저버리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어지럽게 흩어진 꽃잎을 보던 남자는 고개를 들고 앞을 봤다. 지나간 것들을 돌려놓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는지 몰라도, 아직 그에게는 미래가 있었다. 끝나가는 봄. 여름에 가까운 풀냄새가 온 하늘에 가득했다.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남자의 머리 위로, 매달려 있던 꽃잎이 하나, 떨어졌다.
이 남자는 앞만 보느라 머리 위의 꽃잎을 한참 후에야 알겠지만.
208(@ 3taaalk_208)님이 주신 첫문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