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글

[합작]BloodyMerry Night

___hashi___ 2020. 5. 3. 22:23

#우리에게_필요한_건_약이_아니에요_술이지


https://www.youtube.com/watch?v=vRXwHZj7aKs

 

*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역사라고 해서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어디서 봤던 문장이더라.’

토니는 총탄이 뚫고 지나간 어깨를 붙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겨우 술집을 빠져나와 도망쳤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목걸이. 술집에 잠깐 벗어두고 나왔는데. 어쩌면 오래 버틸 수 없을지 몰라. 난 넷-휴먼도 아니잖아.’

성능을 위해 누구나 몸을 기계로 조금씩 바꿨지만 토니는 낯선 이질감 때문에 단백질과 혈류로 이루어진 본인의 몸을 고집했다. 국가에 소속된 일류 공학자, 토니. 그리고 일류 공학자는 지금, 슬럼가에서 늘 일어나는 양아치들의 불법 점거 때문에 피를 쏟고 있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실탄을 쓰는 무식한 놈들이 있다니. 하기야. 무법지대인 슬럼가에는 실탄 갖고 다니는 놈들이 꽤 많지.’

토니는 눈앞이 어두워지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생각을 계속 이어나갔다. 제인. 그녀가 실패한다면 국가는 이 일을 포기해야 했다. 성공할 수 있는 용병이 없다는 말이었으니까.

‘몇 세기가 지나도 돈 많은 기업과 국가의 줄다리기는 왜 멈추지 않는 것일까. 하기야 상관없나.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지구의 공기와 똑같은 공기로 조성된 하늘에 붉은 경고창이 떴다. 좋지 않은 신호다. 기업은 이 슬럼가의 시민들을 포기하고 달아날 셈이야.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회색지대인 슬럼가. 머리 좋은 기업인들은 행성 문화권 개발을 핑계로 슬럼가를 손에 넣었다. 이미 지구에서 고갈된 자원을 뽑아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니까. 물론 기업에게 떡값 좀 받은 높으신 분들이 쉽게 슬럼가를 넘겨줬다는 것도 문제였다. 기업은 필수 자원을 독점 판매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욕은 치명적인 결함을 낳는 법. 배가 부른 기업은 더 이상 슬럼가의 환경을 지구에 맞추지 않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슬럼가의 시민들은 언제든 기업을 부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썩은 고름이 터진 곳은 슬럼가의 시민들이 아닌, 국가 쪽이었다.

‘떡값 받았으면 됐지, 싸우기는 왜 싸워.’

토니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기업인이 의원회에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그 이후 기업의 가장 큰 돈줄인 ‘센터’에 정보국이 은밀한 조사를 시작했을 때부터 뭔가 터질 거라는 건 예견된 사실이었다. 센터에 화재가 일어나기만 하면 되었다. 누군가의 테러가 아닌, 기업 본인들이 자처한 사고처럼 보이도록 해야 했다.

토니는 어깨에서 아릿하게 번지는 통증 때문에 숨을 참았다. 제인. 이 슬럼가 진창에서 구르던 그녀를 발견한 것도, 그녀를 가장 우수한 능력의 용병으로 만든 것도 토니였다.

‘제인, 성공해야 해. 실패하면... 이건 정말 답이 없는 계획이었어. 젠장, 높으신 양반들은 자기 주제를 모른다니까.’

뒤로 묶은 말총머리가 불편해진 토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깨진 선글라스 때문에 눈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래도 운이 좋게 눈은 다치지 않았다. 잠깐 숨을 몰아쉬다 답지 않게 감상적으로 과거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공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용병 관리인이 되지도 않았겠지. 국가와 엮이지만 않았어도 아내를 잃는 일은 없었겠지. 아내를 만나지 않았으면 이렇게...’

몇 번의 총성이 더 이어졌다. 토니는 술집 주인인 K가 몇을 죽였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양아치들은 사이보그를 앞세우고 술집을 점거하려 했다. 전직 형사인 K가 운영하는 술집이야 말로 슬럼가의 회색지대였다. 그런 곳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았지만 굶주린 하이에나들은 가리는 게 없었다. 토니는 눈을 감고 술집에 두고 나온 목걸이를 떠올렸다.

‘제인. 너무 늦어. 난 오래 버틸 수 없을지도 몰라. 왜 이렇게 됐지.’

토니는 역한 냄새가 나는 슬럼가 뒷골목에서 뻗은 다리의 끝을 바라보았다. 미칠 듯한 외로움 때문에 몸이 저렸다. 이 남자에게는 공학에 대한 열정과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이상을 품었던 때도 있었다. 국가에 발탁되고 공학자로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서 그 모든 열정과 이상이 빠르게 바스러진 것은 토니가 생각해도 이상했다.

‘정말. 어쩌다 이렇게...’

눈을 감고 마음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차라리 죽음을 빨리 맞는 게 나았다. 공학과 상관 없는 일로 죽게 되다니. 그건 토니에게는 불명예였다. 그러나 나약한 토니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살 의지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순간, 센터 쪽에서 폭발음이 났다. 더러운 골목 안을 비추던 핑크빛 네온사인 위로 붉은색 불 그림자가 번졌다 사라졌다.

‘이게 무슨-.’

“토니! 들었지, 방금? 해냈어. 너 어디야?”

제인에게 연락이 왔다. 귀에 이식한 용병 전용 단말기에 제인의 날카로운 볼멘소리가 쏟아졌다.

‘결국, 그 독한 여자가 끝내 해냈군. 아. 포기하려고 했는데.’

토니는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고, 제인이 욕을 하기 시작했다.

“야! 시발, 지금 웃음이 나오냐? 어디야!”

“미, 미안해, 제인. 나. 좀 힘든데. 너 먼저 가.”

“무슨 개소리야! 야! 너 총 맞았어? 안 들켰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야!”

“들키지는 않았어. 이건 그냥... 술집에서 맞은 거니까 걱정 마.”

토니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 쥐고 있던 오른손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지켜보았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힘마저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단말기에 쏟아지는 제인의 다급한 음성 신호를 차단하고 눈을 감았다. 감은 눈 너머로 비춰오는 날카로운 네온 불빛. 마땅한 끈이 없는 토니와 제인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었다. 아마 일류 공학자인 토니가 죽어도 새로운 용병 관리 담당 공학자를 데려올 것이다. 그가 토니처럼 확실하게 일을 할 수는 없겠지만. 죽음은 생각보다 빠르게 토니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토니는 이제 과거를 후회할 정도의 정신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번져가는 불길 때문에 기업에서 대기 안정화 모듈을 가속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슬럼가의 시민들은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기업은 공기 조성과 함께 중력과 기압의 조정까지 맡고 있었지만 센터가 폭발한 지금, 잠깐의 시간 동안은 기압 조정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아홉 시간 후에 사람들은 탁구공만큼 압축될 것이다. 물론, 죽은 채로. 요즘은 누구나 몸에 기압 센서를 심었지만 빈민가의 사람들이 심은 기압 센서는 세 시간도 버티지 못했다. 어쩌면 최악의 재난이 일어날지도 몰랐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민에게 피해가 가기 전에 통령이 올 테니까.

‘사람이라는 건 항상 실수를 하지. 그래. 이번에는 거대한 실수인 셈이지. 나는 항상 최선이었지만 결국 내 인생은 온통 실수뿐이었던 것처럼.’

토니의 몸에는 센서도 없었다. 용병과 연락하기 위해 귀에 설치한 단말기 말고는 정말 맨 몸이었다. 토니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피가 섞인 한숨을 뱉으며 생각했다. 공학에 대한 열정, 더 높은 이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속이 쓰린 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사실이라는 걸. 그건 실수 이상이었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죽은 아내의 노랫소리. 토니는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괴로웠다. 목걸이. 당신의 모습이라도 보면 좋았을 텐데. 골목길 벽에, 어두운 하늘에 불 그림자가 번졌다. 토니의 감은 눈 위로 긴 밤이 내려앉았다.

 

*

세 놈. 제인은 얼른 눈으로 쏘아 죽인 사이보그들을 훑고 실탄을 피해 테이블 뒤로 숨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실탄을 쓰는 무식한 새끼들이 있나? 레이저건도 아니고?’

분명 단말기는 토니가 술집에 있다고 가리키고 있었지만 막상 술집에 있던 놈들은 양아치들뿐이었다. 배를 주리고 있는 하이에나들. 병신들. 배가 고프면 상대가 사자라 해도 달려드는 법이고, 아무리 사자라 해도 여러 마리의 하이에나는 꽤나 버거운 상대인 게 사실이었다. 제인은 테이블 밑에 주저앉아 길게 기른 붉은 머리를 얼른 올려 묶었다. 센터를 폭발시키느라 반은 녹아내린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어차피 그녀는 넷-휴먼. 몸의 일부를 기계로 바꾼 국가의 용병. 합금 뼈대와 얼굴 가죽은 토니에게 부탁해 바꾸면 된다. 그러니까, 토니를 찾아야 했다.

처음부터 단말기가 제대로 된 정보를 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이 슬럼가가 부자 나리들 사는 곳처럼 깔끔하고 완벽하게 굴러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양아치들은 다섯 놈이 더 있었고, 그 중 넷은 제인과 같은 넷-휴먼이었다. 그리고, 한 놈은 토니처럼 몸을 바꾸지 않은 꼰대였다.

원래대로라면 넷-휴먼을 상대하기가 더 힘들겠지만 제인은 리얼-휴먼을 상대하기를 더 어려워했다. 순전히 심적인 이유 때문이었고, 그 때문에 종종 토니에게 괜히 욕을 했다. 제인은 테이블 앞에 서있는 유리 진열장을 살폈다. 진열장에 비춰 보이는 놈들은 기계로 바꾼 손을 테이블에 겨누고 있었다. 곧 있으면 손가락이 열리고 총탄이 쏟아질 것이다. 그들은 제인이 용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용병을 상대로 겁을 먹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들은 제인도 충분히 버겁겠지만 술집 뒷골목에서 토니를 찾고 있는 이 술집의 주인도 두려울 것이다. 전직 형사이자 술집 주인인 K는 누구보다도 사살에 일가견이 있었고, 그에 맞게 현시대에는 고물이 되어버린 M-24 따위의 총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제인이 도착했을 때에는 그 과묵한 떡대가 혼자 사이보그를 일곱이나 보내버린 뒤였다.

제인은 얼른 레이저건의 에너지 칸을 흘긋 보았다. 아쉽게도 충전은 너무 느렸다. 임무 할당시에 토니에게 배급받은 좋은 레이저건은 센터에서 날려버렸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던 제인은 급하게 구식 건을 머리 위로 올리고 진열장에 비춰 보이는 사이보그들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탕, 탕.

두 놈을 보낸 제인은 뜻 없는 욕을 뱉으며 얼른 옆의 테이블로 건 뛰었다. 그녀의 발 뒤로 총알이 몇 번 튀어 올랐지만 그녀는 차분하게 테이블 뒤에 숨어 다시 숨을 골랐다. 아무래도 폐를 바꿔 끼워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제인은 토니에게 기대고 싶지 않았다. 동그란 선글라스와 꽁지로 묶은 더벅머리에 다듬지 않은 수염까지. 몸은 고집스레 기계로 바꾸지 않았고 매일 연구실에 틀어 박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가족 없이 양아치로 살던 그녀를 어엿한 용병으로 만든 것도 토니였다. 제인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모든 것에 서툰 그 남자에게 너무 많이 기대고 있었다. 몸을 바꿔주는 것도 그랬지만 그는 그녀를 처음으로 사람이라고 인정해줬다.

“살겠다는 의지가 있으면 사람이야. 제인, 앞으로는 슬럼가에서보다 더 힘들 텐데 괜찮겠어? 뭐. 내가 할 말은 아니지. 내가 널 발탁했으니까.”

제인은 슬럼가가 싫어서 국가 밑으로 들어간 게 아니었다. 토니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의 곁에서 그를 위해 일해주고 싶었다. 곁에 아무도 없는 그녀를, 맨 몸으로 살아야 했던 그녀를 그 서툰 남자만이 제대로 된 사람으로 인정해줬으니까. 제인은 K가 발소리를 숨기지 않고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다.

‘토니를 찾은 모양이군. 내가 찾으려고 했는데.’

제인은 이를 악 물고 총을 잡았다. 열이 뻗치는 걸 눌러 참으려 했지만 생각할수록 야마가 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를 살려준 주제에, 그 새끼, 포기했어.’

제인이 열이 받은 건 토니 때문이었다. 그가 포기했다는 걸, 의지를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얼른 총을 뽑았다. 망설이지 않고, 숨지도 않고, 그녀는 어차피 용병이었으므로, 두 눈에 박은 타깃 집중 센서와 감각 센서를 활짝 열고, 두 명의 넷-휴먼을 날려버렸다.

“제인, 찾았어. 토니 말이야.”

K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토니를 둘러업고 들어왔다. K의 술집이 다시 기압을 맞추는 동안, 혼자 살아남은 리얼 휴먼은 바에 서서 성을 내기 시작했다.

“너, 너 말이야! 내가 누군지 알아?”

코대답 않던 제인은 총구를 똑바로 놈의 머리에 겨눴다. 오차는 없다. 정확하다.

‘저 새끼는 내가 죽여야 해. 리얼-휴먼. 지긋지긋하네, 정말.’

그녀는 센터를 날렸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울고 있다. 토니는, 쓰러졌다. 전직 형사인 K는 이 모든 일에서 물러나 모든 상황을 관조하고 있었고 국가와 기업에서는 아직 제인에게 연락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살아남는 게 전부인 넷-휴먼. 그녀도 알고 있었다. 토니는 악바리인 그녀가 기댈 만큼 강한 인간이 아니었다. K는 조용히 입구 옆의 해치를 열고 다친 토니를 데리고 사라졌다. 뒤처리를 제인에게 맡긴 것이다. 민간인이 용병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좋지 않았다.

바 테이블 위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메달이 하나 놓여 있었다. 제인은 그게 뭔지 알고 있었다. 저 목걸이, 저 메달을 열면 보이는 것은-.

제인은 항상 리얼-휴먼을 죽이지 못했다. 그들은 너무나도 살고자 했다. 슬럼가에서 구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인이 살아남고자 이를 갈았던 시간 못지않게. 그러나 제인은 또 다시 토니 탓을 했다.

‘토니, 이번에도 너 때문이야.’

겁먹은 리얼 휴먼은 어설프게 리볼버를 몇 발 쐈다. 제인은 몸에 날아와 박히는 실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똑바로 남자를 향해 달렸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녀의 몸은, 합금인데다, 용병에 맞게 특수 제작되었으니 쉽게 망가지지도 않았다. 기계가 아닌 단백질로 이루어진 그녀의 심장은 제 박자에 맞게 뛰고 있었다. 그녀는 도망가는 법을 몰랐다. 악착같이 살아남고자 했던 과거로부터, 그 결과가 되어버린 지금으로부터. 그래서 그녀는 또 다시 온 힘을 다해 뛰어들었다. 가장 피하고 싶은 과거이자 지금에게.

‘토니, 일어나면 넌 좀 맞아야 해.’

제인은 레이저 건의 충전식 단자를 해제하고 두꺼운 손잡이로 남자의 머리를 세게 한 대 가격했다. 묵직한 울림음. 워낙 몸이 약한 리얼-휴먼들에겐 이 정도로 충분했다. 그래봤자, 죽지는 않았겠지만.

남자가 쓰러진 걸 확인한 제인은 바위에서 처량하게 빛나고 있는 목걸이를 얼른 낚아채 입구 옆 해치로 걸어갔다. 해치를 열자 보이는 것은, 토니를 치료하고 있는 K. 전직 형사인 그는 뒷 세계로 오면서 간단한 수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거의 다 끝났어. 뭐. 좀 줄까? 술 한 잔 어때.”

제인은 거의 다 녹아 뼈대만 드러난 자신의 몸을 훑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나자빠져 있는 토니 새끼도 뭘 좀 먹긴 해야 할 것이다. 목이 탔다. 아직 내장기관은 인간의 것인 제인. 눈을 찌푸리며 욕을 뱉었다. 토니를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

토니가 눈을 뜨자, 눈 위로 벼락처럼 쏟아지는 것은, 블러디 메리. 시큼한 토마토와 진한 보드카 향에 절로 기침이 나왔다. 몇 번 쿨럭이며 잔기침을 하던 토니는 몸을 일으키려 팔에 힘을 줬다. 그러나 왼쪽 어깨에 저릿하게 번지는 통증과 공중에서 헛도는 느낌 때문에 얼른 왼팔을 보았다. 있어야 하는 팔이 없었다. 그렇게 된 거군. 곧 놀랐지만 얼른 침착히 일어나 앉은 토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술집 입구에 있는... 그래, 그 공간인가.’

누군가 심하게 다쳤을 때 K가 데려오는 곳이었다. 토니 앞에는 앉은 채로 토니의 상태를 지켜보던 K와 블러디메리 잔을 들고 서 있는 제인이 욕을 하고 있었다. 제인은 거의 뼈대만 남은 얼굴을 환하게 드러낸 채였다. 아직 상황파악이 다 되지 않은 토니는 얼굴에 쏟아진 블러디메리를 손으로 대충 닦아내고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일어났군, 토니. 네 어깨 말이야. 총탄은 뺐지만 도저히 팔을 쓸 수가 없겠더라고. 그래서 너한테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그랬군. 고마워. 괜히 고생했네.”

“그래, 개새끼야.”

제인은 손 안에 감춰둔 은빛 펜던트를 토니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악- 소리를 내며 잠깐 뒤로 고꾸라진 토니는 주춤 일어나 제인이 던진 것을 보았다. 침대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은, 목걸이. 토니가 찾던 것. 토니는 멀쩡히 잘 붙어 있는 오른손으로 펜던트를 열었다. 토니를 보며 웃고 있는 아내의 사진. 그제야 안도한 남자는 팬던트 뚜껑을 닫고 제인을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고마워. 찾고 있었어.”

“닥쳐.”

“어쨌든 나, 살았네. 그렇지?”

K는 팔짱을 꼬고 앉아서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죽을 거라고 생각했나봐?”

“피도 너무 많이 흘렸고 늦었다고 생각했으니까. 너무... 궁상맞게 굴었나. 하하. 제인. 지금은 내가 몸이 이래서. 좀 기다리면 원래대로 만들어 줄 수 있지만 말이야. 늦는다는 생각이 들면 다른 담당인한테 물어볼까?”

“됐어. 네가 해. 난 이제 용병 안 할 거야.”

제인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토니는 잠깐 당황했다. 그에게는 이 괄괄한 여자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중요했다. 그전에 그녀가 진심으로 한 말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불같은 성격의 그녀는 자기가 한 말을 엎어버릴 때도 많았다. 토니는 잠시 고민하다 제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제인. 정말 그만두려고?”

“그래.”

“왜, 갑자기?”

“간단해. 남 밑에 있기 싫어. 다른 걸 할 거야.”

제인은 그렇게 말하고 해치 안에 둥둥 떠 있는 홀로그램 영상을 가리켰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토니가 누워있는 동안, 기업은 간단한 사과로 사건을 얼버무렸고 그새 슬럼가 행성에 도착한 통령은 위로를 건넸으며 이제부터 슬럼가를 국가에서 관리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토니는 K가 건넨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쓸만한 자본 때문에 골칫덩어리를 맡겠다는 말인가... 참. 귀찮은 일들 하시네. 자본을 적당히 먹겠다는 말이군. 그런 거지?”

“그런 셈이지. 토니, 제인이 말한 내용은 이제부터야.”

토니는 그 말에 수건을 내리고 영상에 집중했다. 슬럼가에서는 자경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렇겠지. 토니는 왼쪽 어깨에 손을 올리고 생각했다. 슬럼가의 사람들은 이미 기업과 국가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기업은 실패했고 국가는 그전에 기업에게 이 빈민가를 맡기고 도망가지 않았는가?

“제인. 자경단에 들어가겠다는 말이지?”

“그래.”

“K. 저기 우두머리가 누구인지는 혹시 알아?”

“없어, 아직. 어떤 구심점을 중심으로 모이자고 하는 그런 말이 아니더라고. 그냥... 정말 저 뉴스대로야. 아직은 말만 나오고 있고 누가 하겠다고 총대를 메는 건 아닌 모양이야.”

제인은 한 손에 들고 있던 블러디메리를 단번에 비우고 잔을 내려놓았다. 합금 뼈대에 묻은 붉은 술을 닦아내고 말했다.

“지긋지긋해, 누구 밑에 있는 거. 그리고 너, 토니. 네가 날 보살펴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당신을 보살펴야 할 정도의 인간이잖아. 하지만 난 당신을 돌볼 마음은 없고. 난 갈 거야.”

토니는 제인이 높게 올려 묶은 붉은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맞는 말이다. 그녀는 용병이었으므로 토니가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 토니보다는 제인이 더 강한 사람이었다. 토니는 없는 왼팔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까지 몸을 기계로 바꾸지 않았던 것은, 이물감 때문이었다. 시력이 좋지 않은 눈을 기계로 바꿔보려 했지만 몸이 거부했다. 가끔 속이 쓰려 내장기관을 바꿔보려 했지만 그 또한 몸이 거부했다. 자경단에 대한 뉴스가 나오는 동안 토니는 아내의 사진이 담겨 있는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몸이 이물감 때문에 거부한 게 아니라, 토니의 마음이 거부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 똑똑한 공학자가 자신의 몸과 맞는 기계를 찾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얕게 한숨을 뱉은 토니는 곧 뒤통수를 긁으며 미소 지었다. K는 토니가 마음을 굳혔다는 사실을 알고 웃으며 해치 밖으로 나갔다. 토니에게 새 술잔을 주기 위해. 제인은 성을 내며 왜 웃느냐고 툴툴댔지만.

“제인. 그럼 잘 부탁해. 앞으로는 내가 너한테 기대야겠네.”

“... 무슨 소리야? 야, 그런 끔찍한 말은-.”

“나도 그만두려고, 용병 관리인. 팔도 갈아 끼워야지. 기계로.”

제인은 생각지도 못했던 토니의 선언에 잠깐 놀라 멍하니 토니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토니는 진심이었다. 아내를 잃은 과거를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공학의 대가가 되면 그의 삶이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대가가 되었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만두는 수밖에. 국가 밑에서 명성과 권력을 얻었지만 열정과 이상, 심지어 가장 소중한 사람까지도 잃어버린 그는, 제인과 함께 자경단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친구가 생기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건 그냥 내 착각이었나.’

토니는 자신의 아둔함 때문에 고개를 저었다. 다시, 살고 싶어 진 것이다.

“자. 받아, 토니.”

해치 안으로 들어온 K가 토니에게 건넨 술은, 블러디메리. 토니는 기분 좋게 웃으며 술잔을 받아 들었다. 성격 좋게 웃는 토니를 보던 제인은 결국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또 너랑 다녀야 하느냐며 짜증을 냈지만 즐거워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역사라고 해서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토니는 그 문장이 어디서 나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의 문장이었다. 문학을 공부하던 그의 아내가 책꽂이에 꽂아 놓았던 책에 있던 구절이었다. 토니는 블러디메리를 천천히 비우며 그 글에 다음 문장이 있었다는 걸 그제야 기억해냈다.

그러나 우리가 용기를 갖고 맞선다면 그런 역사는 결코 다시 오지 않는다.

술잔을 다 비운 토니는 잔을 K에게 건네고 해치 밖으로 나섰다. 할 일이 많았다. 팔을 갈아 끼워야 하고, 그다음에야 제인을 고쳐줄 수 있겠지. 국가에 그만둔다는 말을 해야 하고 자경단이니까 사람을 모집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국가로부터 슬럼가의 자치권을 얻어내야 할 것이다. 모든 일이 처음이고 쉽지는 않겠지만 토니는 더 이상 물러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살아났고, 살 것이므로.

 

*

K는 술집을 나서는 두 사람을 마중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피의 여왕, 메리 1세. 그녀의 삶은 ‘피의 여왕’이라고 불릴 만큼 사실 잔혹함으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강인했던 왕이었다. 그러므로, 블러디메리. 때 묻은 시가지를 비추는 네온 등 사이로 멀어지는 두 사람에게 건네는 축하의 잔. 국가와 기업은 물론이고 자경단에도 속하지 않은 K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보며 블러디 메리의 뜻을 조용히 읊었다. 축복을 내리는 사제처럼.

단호히, 승리하리라.


담님이 주최하신 술합작 참여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