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글

도래하는 미래를 향한 저주

___hashi___ 2020. 4. 30. 16:34

해치가 닫히자 몇 개의 문이 더 열렸다. 기압과 중력, 공기의 조성까지 세밀하게 조정되는 동안 제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리더라도 폐까지 바꿔야 할 것 같아. 위험부담이 큰 수술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임무를 성공하기 좋은 몸으로 바꾸는 게 더 나은 선택이기는 했다.

마지막 해치가 열리자 보이는 건 K의 술집. 은하 팔에 위치한 이 술집에 손님이라고는 뜨내기들 밖에 없었지만 가끔 진짜가 올 때가 있었다. 그 진짜 중 하나가 토니와 제인이었다. 토니는 선글라스를 끼고 덥수룩하게 기른 머리를 꽁지로 묶은 중년의 남자였다. 머리를 쓰는 공학자라 몸은 튼튼하지 않은 편이었다. 거기다 대부분은 몸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몸의 일부를 기계로 바꾸는 넷-휴먼이었지만 토니는 단백질로 이루어진 본인의 몸을 구태여 고집하는 리얼-휴먼이었다. 국가 소속 용병을 관리하는 이 고지식한 남자는 술을 마시다 말고 해치가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씩씩대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제인을 보고 살짝 흠칫했다.

제인. 왔구나. 근데 그 꼴은...

그래, 맞아. 실패했어.

토니는 제인의 입에서 ‘실패’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티 내지 않으려 괜히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제인은 신체 능력이 뛰어났고 냉철한 판단력을 겸비한 수준 높은 용병이었다. 토니는 결국 동그란 선글라스를 벗고 꺼칠한 얼굴을 맨 손으로 문질렀다. 상황만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능력 있는 용병인 제인이 임무에 실패했다. 그건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마침 술집에는 손님이 토니와 제인밖에 없어서 거리낌 없이 국가의 일을 말할 수 있었다. K는 입이 무거운 전직 형사였으니 믿을 수 있었다. 토니가 팔짱을 꼬고 제인을 지켜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우선... 그 얼굴부터 어떻게 좀 해야겠어.

알아. 하지만, 폐도 바꿔야 할 것 같아.

제인. 그 쯤 되면 폐만 문제라고 할 수는 없어. 아마 심장도 펌핑이 더 잘 되는 모델로 바꿔야 할 거야.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이야. 너는 이 일에서 제외가 될 거라고.

시발.

어쩔 수 없어. 다른 용병을 쓰는 게 윗선에서는 좋을 테니까. 내 생각에는... 네가 실패했는데 다른 누가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토니는 턱에 난 다듬지 않은 수염을 매만지며 반은 녹아내린 제인의 얼굴을 살폈다. 합금 뼈대가 드러날 정도로 심한 꼴을 봤으니 저 자존심 센 여자가 임무를 포기할 리가 없을 것이다. 제인은 붉은 곱슬머리를 거칠게 하나로 올려 묶고 여전히 씩씩대고 있었다. 묵묵한 술집 주인인 K가 술을 권했지만 제인은 필요 없다며 거절했다.

어떻게든 해줘. 내 관리인은 당신이잖아?

알아. 하지만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제인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젠장. 낮게 욕을 읊조린 제인은 고개를 숙이고 부서진 종아리 조직을 바라보았다. 이 은하 팔 한 구석 슬럼가에서 자란 제인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 것은 토니뿐이었다. 국가의 용병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도 토니의 끈질긴 설득 덕분이었다. 그러므로 제인은 어떻게든 성공하고 싶어 했다. 이 고지식하고 답 없는 남자에게 인정에 대한 보답을 해주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토니는, 누군가를 죽여야지만 인정받을 수 있는 국가의 용병 시스템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매일 밤이면 죽은 아내와 딸이 묻혀 있는 지구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잠을 못 잤다. 두 사람은 낙오자였다. 은하 중심이 아닌, 팔에 멀리 떨어져버린 낙오자들. 국가의 기밀을 수행할 사람이라면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끈 떨어진 놈들이어야 했고 이 두 사람은 마침 능력 좋은, 끈 떨어진 사람들이었다. 토니는 좋지 않은 감 때문에 얼른 술잔을 비웠다.

어쨌든 돌아가지. 미안하지만, K. 값은-

됐어. 기억 안 나, 토니? 저번에 자네가 나중 값까지 계산했잖아. 오히려 더 마셔도 좋을 정도라니까?

아, 그랬나.

하여간. 자네 저번에 너무 취했지. 오늘 일은 걱정 말고 돌아들 가.

가벼운 인사를 마친 K는 주방 뒤로 들어갔다. 토니와 제인은 해치를 열었다. 어쨌든 토니의 집으로 돌아가 제인의 몸을 원 상태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해치 안에서 적정 공기 조성을 맞추는 소리를 듣는 동안 토니는 기압 조정 헬멧을 쓰며 생각했다. 어쩌면 지구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