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온][자캐] 상냥하지 않은 모건씨
아, 또... 여전하군.
리온은 자신의 어깨만큼의 높이에 잔뜩 걸린 담쟁이덩굴을 바라보며 눈을 살짝 찌푸렸다. 이 덩굴을 잘 지나가면 그 남자의 집이 있었다. 매번 이 집에 올 때마다 하는 생각이었지만 이번에도 절로 고개를 드는 의구심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도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담쟁이덩굴 가운데에는 작은 구멍이 터널처럼 뚫려 있었고, 그 남자는 이 좀스러운 터널로 드나들었다. 그러므로 그에 맞춰주는 수밖에 없었다. 리온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엉거주춤 허리를 굽혔다. 어쩔 수 없지. 그 남자는 ‘집을 정리한다’라는 개념이 박혀 있지 않으니까.
피스메이커 자켓에 달라붙는 따가운 풀들을 겨우 제치고 앞으로 나아가자, 지붕이 낮은 집이 보였다. 오늘도 설득하러 왔지만 아마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알면서도 리온은 차분하게 집 문을 두드렸다. 저녁시간이었고 자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남자는 야행성이지. 잠시 후 집 안에서 뭔가가 우당탕 거리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와 함께 작은 신음소리가 문 밖으로 들려왔다. 역시. 리온은 이마에 한 손을 짚고 불안한 얼굴로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내 노크 소리, 듣긴 들은 거 맞지?
조금 더 기다리자 문이 열렸다. 소리도 없이 문 건너편에 서 있던 것은 까만 선글라스를 낀 창백한 표정의 남자였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여전하네.
뭐가.
뭐...
리온은 그 말에 답하기를 포기하고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좁은 방 안에는 낮은 스탠드 하나만 불이 들어와 있었고, 주변에는 잔뜩 널린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구들 투성이었다. 책상 한켠에는 잔뜩 쌓아 놓은 종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해독하기 어려운 수식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방 안에는 청소를 하지 않은 지 오래인 듯 퀴퀴한 냄새가 자욱했고, 그 냄새를 참다 못 한 리온이 물었다.
혹시, 환기는 안 하는 거야?
그런 거 몰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리온의 말에 귀찮다는 듯 대꾸를 한 남자는 등을 보이고 구석에 앉아 뭔가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리온이 생각하기에 이 남자는 괜찮은 능력을 갖고 있었다. 별의 아이로 선택받은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에테라 공학으로 이만큼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에테라 공학자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란더에게도 귀감이 되는 사람이었지만, 이 음침하고 성가신 성격 때문에 란더는 이 사람을 피해 다녔다. 본인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 같았지만.
그래서, 뭘 만들고 있던 거야?
그게, 이건 말이야... 음... 아니야. 어차피 말해도 모를 거야.
뭐... 응... 그런가...
왜 온거야?
남자는 구석에 주저앉은 채로 스패너를 손에 들고 흘긋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남자의 앞에는 거대한 기계가 잔뜩 꼬인 전선을 내보이며 서 있었다. 남자는 작게 하품을 한 번 했다. 자르지 않고 내버려 둔 긴 머리는 정리를 하지 않아 이마를 덮고 사방으로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고, 얼굴 여기저기에 붙인 반창고는 새로 갈아야 할 것 같아 보였다. 어디가 아픈가 싶을 정도로 창백한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사실 이 남자는 알고 있었다. 오늘도 리온이 자신을 귀찮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건씨. 술 한 잔 할래?
왜.
그러지 말고.
귀찮아. 바쁘기도 하고.
내가 살게.
리온. 난 가디언에 들어가지 않을 거야.
일단, 술집으로 가지.
술집을 가서 할 말이라는 건, 가디언에 들어와 달라고 부탁하려는 거잖아
그럼 그냥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모건씨, 이렇게 햇빛도 안 쬐고 다니면 탈 나.
참나, 누구한테 뭘 말하는 거야. 리온. 당신 걱정이나 해야 하는 거 아냐?
그건, 일부러 리온의 신경을 긁기 위해 뱉은 말이었다. 모건은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고 좀 친해졌다 싶은 사람에게는 필터 없이 말을 뱉었다. 모건은 기본적으로 배려라는 걸 하지 않는 편이었다.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잘 몰랐으니까. 그는 사람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냥, 대다수의 사람들이 귀찮았다. 사람보다는 공학에 더 마음이 끌린 것뿐이다. 모건은 자신이 별의 아이라는 걸 고집스럽게 숨기고 살았고, 그건 공학에 바쳐야 할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남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가 리온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끈기 있는 리온은 도저히 모건을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 몸이 언제까지 괜찮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 나도 알아.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하고 싶은 거야. 모건씨, 당신이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말이야.
최선... 최선이라... 리온. 내가 무엇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건지는 알아?
모건은 비웃음이 깔린 어투로 말을 툭 뱉고는 다리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에서는 선글라스를 쓰지 않는 그는 뒤로 돌아 리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모건의 그 질문에 리온은 답하지 않았다. 리온은 그가 무엇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모건은 공학 하나만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도 인류애라는 게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리온의 그것에 비하자면 아주 최소한의 인류애일 것이다. 모건은 공학이 인간의 삶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자연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자연은 공학자인 그에게 좋은 적수였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에 비하자면 재미없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모건은 바지 주머니에 한쪽 손을 찔러 넣고 다른 손으로 책상 위에 올려놓은 물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뭔가를 찾는 것 같았다. 분주히 손을 놀리던 모건은 여전히 책상 여기저기를 살피며 물었다.
가디언은 잘 되어가고 있는 거 맞아?
그렇다고 생각해.
정말이야? 난 바깥을 잘 나가지 않아서 소문이 어떻게 도는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리온, 당신이 하고 있는 일, 정말 가장 마땅한 방법인 거 맞아? 가디언이 잘 굴러간다고? 납득이 가질 않는데. 그렇잖아. 그 귀족 나리들이랑 평민인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잘 어울리고 다닌다고?
모건이 책상 위를 조금 더 바라보다 문득 리온을 향해 쏘아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건- 아니겠지. 그렇지? 분란이 일어나는 단체에서 평화를 만들어 내겠다고? 피-스-메-이-커. 그렇지?
여기.
리온은 더 이상 대꾸 않고 책상 한 구석에 밀려나 있던 선글라스를 모건에게 건넸다. 찾던 물건을 돌려받은 모건은 떫게 웃으며 말했다.
리온.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갈아 넣을 정도의 가치가 없는 곳일지 몰라. 왜 그렇게 열심인 거야?
갈 거야?
원래도 웃지 않고 있었지만 리온은 정말 웃고 싶지 않았다.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오합지졸인 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리온도 크루세이더의 단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모건에게 그런 모진 말을 들을 정도로 가디언이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모건은, 여전히 고집을 꺾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음, 갈까? 사준다며. 그래, 어디 가 볼까? 물론 가디언에 대한 말은 안 듣겠지만 말이야.
모건의 푸른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수호성 때문이 아니더라도 원래가 푸른색 눈인 모건은 귀찮다는 듯 얼른 동그란 선글라스를 썼다. 앞장서서 집 밖으로 나서던 모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리온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또, 화를 낼 뻔했어. 어쩌면 모건씨는 내가 화를 내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리온은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모건은 이미 현관문 밖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리온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리온은 저 남자와 입씨름을 해야 할 생각에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도저히 모건을 포기할 수 없었던 리온은 심호흡을 하고 문 밖으로 나섰다. 그건 한동안 모건에게 시달릴 각오를 마친, 그런 심호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