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글

판의 인장

___hashi___ 2020. 1. 23. 02:53

남자는 편지를 받았다. 잠깐 스친 두꺼운 손가락 마디가 불에 데인 듯 뜨거웠다. 남자는 천천히 봉투를 훑어보다 마음먹은 듯 페이퍼 나이프를 꺼냈다. 그냥 씰을 떼기만 해도 될 텐데. 남자는 구태여 나이프로 천천히 봉투의 접힌 부분을 도려냈다. 나이프의 끝이 밝게 빛났다. 나는 말없이 가만히 서서 남자가 편지봉투를 가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초를 녹여 스탬프를 찍는 발송인도 그렇고, 페이퍼 나이프로 편지를 뜯는 수신인도 그렇고. 무슨, 르네상스 시대에서 걸어 나왔나. 그 옛날의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비밀을 배달하는 집배원. 이 일을 시작한지는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물론 초짜다. 그러나 사람의 비밀을 누군가에게 대신 전달하는 일은 그 누구라도 능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처음에는 괜찮았다. 남의 밑에서 부하직원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개인 시간도 충분히 보장이 되는 편이니까.

원래는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디자인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만하면 좋은 회사였다. 크지 않은 회사였지만 봉급도 괜찮았다. 취업난에서 손쉽게 취업에 성공한 나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야근과 끝없는 팀장의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 하고 뛰쳐나왔다. 삼 년. 삼 년이면 많이 참았지. 이때까지 나라는 인간이 성장하고 있다는 보람은 당연히도 없었다. 스물아홉의 나이인 지금까지. 더 일찍 그만두었어야 했나 자주 후회를 했지만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봤자 늦었다. 이제라도 그만둬서 다행이지. 당분간 돈을 모을 생각은 없다. 우선 망가진 삶의 루틴을 끌어올리는 것. 그게 먼저다. 몸이 망가지면 정신도 같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돈은 그 다음이다.

얼마간은 디자인은 하고 싶지 않았다. 디자인 다음으로 내가 잘 하는 일을 찾아야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입이 무거운 편이었다. 타인의 비밀을 내 안의 깊은 곳으로 삼켜버리는 블랙홀처럼. 그리고 여기저기를 쏘아 다니는 걸 좋아했다. 그저 얽매이는 게 싫었고 개인 시작이 보장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안일했기에 갖은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나에게 비밀을 맡기는 성 소수자는 흔했고, 군대에 간 성 소수자는 더 흔했다. 부모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람도 많았고 사랑하면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흔했다. 아내를 두고,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사람도 흔했다. 물건을 훔친 사람도 흔했고 누군가를 죽인 사람도 의외로 몇 있었다. 모두 이 년이 되지 않은 지금까지 내가 겪어야 했던 사람들이다. 그쯤되자 모든 인간들에게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도대체 인간의 비밀이라는 게 무엇일까 싶어서. 누구나 자기가 간직한 비밀이 특별하다고 느끼고는 하지만, 결국 특별한 비밀이라는 건 없다. 그렇다. 특별할 것은 하나도 없다. 누구나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지만, 정말 특별한 인간이란 하나도 없다.

그렇게 일을 그만두려 했던 찰나에 또 일이 들어왔다. 남자는 금발의 긴 머리를 땋은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집을 찾아갔던 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집 마당에 가득 핀 꽃들을.

가든. 그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정원이었다. 이름 모를 꽃들이 반겨주는 길목의 끝에 나무 현관문이 있었다. 집은 나무로 만든 이글루 같았다. 이런 곳도 있던가. 낮은 울타리가 마당을 둘러싸고 있었고, 나무 이글루 벽마다 작은 유리창이 보였다. 창문은 모두 열려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를 가장 먼저 반겨주었던 것은 깔끔함이었다. 단단하게 뭉쳐서 허공에 떠돌고 있는, 깔끔함.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 무취의 향. 그리고 난 다음에야 벽난로와 푹신한 러그가 눈에 들어왔고 무엇보다도 벽난로 앞의 흔들의자에 앉아 발밑으로 고개를 떨군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봐왔던 사람들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마 그 자리에 잠시 동안 가만히 서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정말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왔다. 연예인, 정치인, 뒷세계의 사람도 만나보았던 터였다. 그럼에도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은 본 적 없었다.

남자는 얼마간 후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제야 인사를 할 정신이 들었다. 정확하게는 그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얼른 얼버무리고 만 것이었지만.

안녕하세요, 비밀 배송 업체에서 나왔습니다.

. 어서오세요. 피곤하셨죠?

아니요, 괜찮아요.

잠시 여기 앉으세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가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 그림이 아니라고. 정말 그림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목소리도 있고 단단한 실체감도 있다. 그 모든 것이 비정상적으로 아름답다는 게 문제였지만. 나는 남자가 안내한 테이블에 앉았다. 러그 위에 놓은 작은 나무 테이블로 색색의 실로 뜬 테이블보가 씌워져 있었다. 테이블보는 많은 공을 들인 물건처럼 빈틈없이 짜여져 있었지만 눈을 돌리자 곧바로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제야 집안의 물건들이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집은 나무 이글루라 벽이 둥글게 휜 채로 이어져 있었고, 방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나마 문이 하나 있었는데, 나에게 화장실을 쓰고 싶으면 저 문을 열면 된다고 말했다. 화장실 하나를 빼고는 어디에도 방이 없었다. 가운데에 러그와 탁자, 벽마다 침대, 탁자, 벽난로, 싱크대, 화장대가 있었다. 그리고, 가구마다 독특했지만 시선을 돌리면 무엇이 그 자리에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길가에 피어 있던 꽃들도 희미한 그림자들 같았다.

내 어처구니없는 기억력 때문에 당황스러웠지만 남자가 곧 차를 가져왔다. 당황하지 않으려 해도 당황스러웠다. 이 집을 나가고 싶다. 차라리 혼자 그림을 그려서 파는 게 낫겠어. 비밀을 전해주는 일이라는 거 이제 하지 않을래. 계속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잖아. 나는 겁이 났다. 지금 너무나도 특별해 보이는 이 남자의 비밀이 그저 그런 평범한 것일 까봐. 남들과 똑같이 평범한 사람일 까봐.

그러나 남자는 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 등 너머의 무언가를 보고 있는 남자의 눈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비밀에 대해 말하려 하는 것일까? 모두가 자신의 비밀의 무게를 견디지 못 하고 나에게 털어놓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나는 그저 비밀을 전달해주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다, 계속해서 쓰고 있지 않나. 사실 특별한 비밀이라는 건, 특별한 사람이라는 건 어디에도 없다고.

재미없죠?

?

남자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찻잔을 주고도 아직 주전자의 물을 따르지 않은 채였다. 먼 허공을 응시하던 남자는 나를 보고 베실 웃으며 말했다.

난 재미없는 사람이에요.

달리 할 말이 없어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남자는 그 아름다운 얼굴로 비어 있는 웃음을 짓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말이 없었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좋을텐데. 그렇게 시간 속에 잠시 잠겨있던 남자는 천천히 꿈에서 깨어나듯 말했다.

내가 이제 뭘 하면 되죠?

?

...... 다른 사람들은 뭘 하죠? 그런 걸 알려 주세요. 이제 제가 뭘 하면 되는지.

이 사람. 안내문에 써 있는 내용 무엇 하나 제대로 읽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옆으로 멘 가죽가방에서 파일철을 꺼내 핵심적인 안내사항을 짚어줬다.

우선, 저로부터 비밀이 발설될 일은 없습니다. 고객들과의 약속은 중요하니까요. 기본입니다.

그리고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남자는 파일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를 신뢰하지 못 해서 꼼꼼하게 내용을 읽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전히, 비어 있는 얼굴이었다. 무엇도 담지 않은 얼굴. 그 얼굴로 내 손 끝에 걸린 문장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는 다음장을 넘겨 간단한 주의사항을 안내했다. 발송인, 수신인, 배달자인 셋을 제외한 다른 누군가에게 비밀이 알려진다 해도 업체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업체라고 해봤자 나 한 명이 운영하고 있었지만. 규모가 너무 작았기 때문에 배상금을 무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러나 이 남자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나의 말은 일찍부터 듣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필요한 건 주의사항이 아닌 비밀을 배달하는 절차일 것이다. 나는 빠르게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그제야 남자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비밀이 무엇인지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좋다. 편지나 물건,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발송인은 나에게 비밀을 전달한다. 나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골목을 누비며 비밀을 수신인에게 전달한다. 수신인이 비밀을 받았다는 증거를 들고 다시 발송인에게 확인을 받는다. 이 절차가 끝이 나야 내 계좌로 입금을 한다. 그것으로 일은 끝난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렇군요. 쉽군요. . 저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배달하는 분께는 쉽지 않겠네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감수하고 하는 일이니까요.

남자는 자리에서 가볍게 일어나 바로 뒤에 놓인 긴 탁자로 나아갔다. 그러고는 자리에 앉아 숨을 가다듬었다. 남자는 등을 보인 채로 말을 걸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편지를 마저 끝낼게요.

. 천천히 하세요.

가는 어깨선이 천천히 올라갔다 내려오는 걸 바라보았다. 남자가 건네준 차는 얼그레이였다. 홍차를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우선 마셨다. 따뜻한 차가 간절했으니까. 남자는 책상 밑의 낮은 서랍에서 뭔가를 꺼냈다. 얼핏 보니 나무 손잡이 끝에 뭔가를 담는 둥근 스쿱이 보였다. 아이스크림 스쿱 같은 건가? 남자는 탁자 위의 작은 선반을 열어 뭔가를 고르다 마음먹은 듯 조약돌 같은 것을 꺼냈다. 밝은 연두색과 노란색. 공기돌 같은 조각을 스쿱에 넣고 구석에 밀어져 있던 알콜 램프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스쿱을 불 위에 가져다대었다. . 스탬프 씰을 찍으려 하는 거구나. 요즘 같은 시대에? 그제야 지금까지 묘하게 존재감이 없던 집 구석구석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남자는 스탬프를 찍고 촛농이 굳은 다음에야 나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편지는 깨끗한 아이보리 봉투에 잘 담겨 있었다. 손가락에 잡히는 두께가 얇았다. 그럴수록 더 위험한 비밀인 경우가 많았다.

봉투에 쓴 주소로 부탁드려요.

집을 나올 때 쯤 머릿속에 집에 대해 강렬하게 남는 인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 빼고. 창백한 피부에 밝게 빛나고 있는 금발의 머리(탈색한 걸까?). 그리고, 맑은 남자의 눈. 나는 머리를 푹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는 황급하게 집을 뛰쳐나왔다. 맡겨준 비밀을 새어나가는 일 없이 확실하게 전달하겠다는 인사도 하지 못 했다.

 

사람의 눈을 피하기 좋은 길을 생각하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편지봉투에 쓰여 있는 주소로 가는 모든 길이 미로처럼 복잡했기 때문이다. 수신인은 뒷세계에서 일하는 사람인가? 이렇게 찾아가기 어려운 곳에서 살고 있다는 건 그런 의미일까.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것일까?

비밀을 배달하는 일은 원래 몇일씩 걸린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루 안에 이 모든 걸 끝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그 이유는 나로서도 설명할 수 없었지만. 편지를 받아들자마자 수신인의 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생각만큼 멀지 않았다. 아무리 먼 곳에 있다 해도 오늘 당장 출발할 생각이었지만.

수신인의 집은 높고 좁다란 첨탑 같아 보였다. 첨탑과 다른 게 있다면 첨탑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는 것이고, 탑의 모양을 한 집이라는 점이다. 집에 창문은 있었지만 전부 잠겨 있었고 그마저도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다. 두꺼운 시멘트벽은 유난히도 딱딱했다. 잠시 집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주위에 흐르는 정적을 느꼈다. 곧 정신을 차리고 노크했다. 한 번. 두 번. 조금 더 기다리다 다시 한 번 더. 문은 아무리해도 쉽게 열리지 않았다. 낯을 많이 가리는 사람인가? 다시 한 번, 두 번. 얼마간 더 기다리고 난 다음에야 무거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 누구요?

세월의 갖은 풍파를 겪은 마초가 낼 법한 목소리가 들렸다.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던 아름다운 발송인을 떠올렸다. 정반대로군. 나는 발신인의 이름을 말하고 그가 보낸 배달부라고 말했다.

잠시 기다리쇼.

곧이어 육중한 쇠문이 열렸다. 문 뒤의 남자가 나를 쏘아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누가 보냈다고?

도리언 그레이와 마도로스 k. 정말 그랬다. 발신인과 수신인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편지를 다 읽은 남자는 방에서 나가자고 말했다. 남자의 집은 계단도 많았고 방도 많았다. 남자는 일층으로 내려가 나를 거실에 앉혀놓고 술을 꺼내왔다.

, 술은 괜찮습니다.

. 맘대로 하쇼. 나는 마실 테니까.

오프너가 없는지 숟가락으로 거칠게 병맥주를 땄다. 다부진 몸에 땅딸막한 키. 군데군데 거친 상처들이 눈에 띄었고 얼굴은 찍어 누른 듯 넓은 데다 두 눈이 부리부리해 무서운 인상이었다. 그런 인상에 비해 조용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시계공이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 약이 다 한 시계에 약 넣는 것 말고는 큰 일이 안 들어오긴 하지만 말입니다. 요즘 같은 불황에는 먹고 살기가 참 힘들죠.

남자는 무뚝뚝하면서도 친절한 편이었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남자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볼 요량이었다. 그도 그럴 게, 도대체 그 아름다운 남자가 이 사람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아폴론이라면 이 남자는 헤파이토스다. 마침 남자는 더 이상 잡담을 할 마음이 없었는지,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이 편지를 보낸 사람 말입니다. 만나봤죠?

? . 직접 건네받은 겁니다.

그렇군요. 참 궂은 일을 하는군.

아닙니다.

그 놈이랑 나는 쌍둥이요.

?

잠시 숨을 멈췄다. 쌍둥이라니? 그와 이 남자가?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는 이 둘이? 무례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놀란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 표정을 살피던 남자가 말을 이었다.

. 놀라는 것도 이해는 합니다. 우리는 너무 다르니까요. 생긴 것만 해도 다르죠. . 부모님도 너무하지, 어떻게 그 얼굴의 단 하나라도 나한테 안 줬는지가. 뭐 어쩌겠어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전혀 다르게 살게 된거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잠자코 그의 말을 듣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생각해보쇼. 어린 나이에 친구들이 뭐라고 말을 해댔을지. 그 놈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이 들끓었죠. 모두가 그 애를 사랑했어요. 나는 사랑받기가 어려웠고. 나는 내 안에 고립되어 있기를 택했소. 언제나. 그러면서도 주위를 끊임없이 관찰했지.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내가 그나마 미움 받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나는 그놈이 축복받았다고 생각했소. 적어도 얼굴 떄문에 미움 받을 일은 없으니까. 그런데 그거 아쇼? 그렇지 못 하다는 거야. 그 놈은 나보다도 불행한 인생을 살아야 했소. 적어도, 그 놈에게는 자기 자신이랄 게 없었으니까.

?

그 집 가봤소? 뭐 기억에라도 남는 게 있던가?

대답할 수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강렬한 인상은 그의 얼굴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 스탬프는 기억에 남지 않던가.

스탬프. 스탬프를 찍던 건 기억에 남습니다.

. 그거?

남자는 바지 주머니에서 비틀어진 담배곽을 꺼냈다. 한 대를 입에 물고 불을 켠 다음 말을 이었다.

걔가 그걸 유난히 좋아하지. 중학생 때 걔가 스탬프를 여기저기에 열심히 찍어대는 걸 보고 좀 놀랐죠. 그런 애가 아니거든. 뭐랄까, 잘생기긴 했는데, 좀 인형 같아. 무슨 소린지 알겠소? 비어 있는 껍데기뿐이라는 말입니다. 항상 그렇게 느꼈어요. 나는 생각이 너무 많은데 비해 그 놈은 생각이라는 걸 전혀 안 하는, 비어 있는 마네킹 같았지. 그런 그 놈이 뭔가에 집착하기 시작한거요. 그래서 왜 재미도 없는 스탬프를 모으냐 물어보니까 이렇게 말하더군. 아니야. 정말 재미있어. 찍는 대로 모양이 나오잖아. 무슨 소리인지 알겠소?

전혀 이해할 수 없어서 계속 침묵을 지켰다. 차라리, 술을 한 잔 마시는 게 나을 것 같다.

모두에게 사랑받았기 때문이지. 사람들은 지들이 원하는 대로 내 동생을 보았소. 동생놈은 그들의 기대에 부흥하고 싶었을 거요. 어리니까.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부던히도 연기했지. 나중에 가서는 자기도 자기 스스로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게 되어버린 거요. 그래서 허공에 뜬 인간이 되어버린 거지.

남자는 병맥주를 다 비운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스탬프를 뜯지 않았소. 그 놈이 좋아하는 거니까. 냅둬야 할 것 같아. 나는 걔랑 너무 멀어져버렸소. 그래도 그놈이 나를 찾아줘서 고맙군.

한참을 말이 없던 남자가 불현 듯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 놈 좀 말려주쇼. 당신이 서투르긴 해도 나보다는 나을 겁니다.

?

남자는 테이블 위에 접어놓은 편지를 툭 올려놓고 말했다.

이거, 유언장입니다. 자살하겠다는군.

편지 봉투에 선명하게 찍힌 스탬프 씰이 반짝였다. 나는 편지의 내용도 보지 않고 그 자리를 박차고 뛰어 나왔다.

 

그만해요.

천장에는 얇은 못이 박혀 있었다. 겨우 밧줄을 걸었는데 목을 매달려고 하면 곧바로 못이 떨어질 것 같다. 허술하군. 저토록 허술한 것에도 사람은 죽을 수 있다. 남자는 비어 있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떤 누구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지긋지긋하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비밀을 전달하려 애를 쓰는 것일까. 애초에, 죽음이 비밀이 될 수 있을까? 이 멍청이는 정말 자신의 죽음을 비밀로 하려고 했을까? 의자를 밟고 올라선 남자의 다리가 조금 떨렸다.

?

정말, 하지 마요.

나는 남자에게 뛰어가 그의 허리를 잡았다. 해야 할 말인지 그렇지 않은지 가늠하지도 못 한 채로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당신은 죽고 싶지 않은 거야, 그렇죠? 그러니까 편지를 쓴 거에요. 정말 죽는 걸 비밀로 하고 싶었다면 나를 찾지도 않았겠죠. 혼자 죽으려 했을 거에요.

말했잖아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남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의 비밀이라는 건 정말 하찮다. 이렇게 비어 있는 당신이 평범한 사람일까봐 겁이 났는데,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당신은 평범하기 짝이 없어. 그저 땅에 발을 붙이지 못 하는 것으로 겁을 내는, 무거워지지 못 해서 겁을 내는, 도망치려 하는, 그래, 사람은 누구도 특별하지 않아. 알고 있는데도, 죽음에라도 매달리고 싶어 하는 그 눈이 너무나도 반짝였다. 말이 안 돼, 특별하지 않다고, 특별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냥 스탬프 씰을 모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왜 아무도 이 인간에게 그 당연한 말을 안 해준 거야, 그러니까 아직도 이렇게 애 같잖아, 세상이 너무 원망스러워서

키스해버렸다.

나는 남자다.

당신은 특별하지 않아요. 누구도 특별하지 않구요. 알겠어요?

입을 겨우 떼고 내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멍하니 밧줄을 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특별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그제야 밧줄을 꼭 잡은 두 손을 놓았다.

 

보라색 초를 샀다. 새로 만나는 애인이 보라색 스탬프를 찍고 싶다고 말했다. 그건 그와 나만의 비밀. 놀랍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그저 그런 비밀.

나는 비밀을 배달하는 집배원. 이 일을 시작한지는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동인지에 올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