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텔라비스

[전력][오든별]당신이 가는 길

___hashi___ 2020. 2. 29. 23:29

괜찮으세요?

얼빠진 얼굴을 한 채로 겨우 몸을 일으키고 있는 나에게 상냥히 물어온 것은, 오든. 그가 상냥하게 내밀어준 손을 잡고 힘겹게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마물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났고, 그때마다 나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든과 둘이 순찰을 하고 있었는데 하필 이때 마물이 나타나다니. 오든 혼자서 무리일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금방 끝났어요. 요새 마물이 너무 많이 나타나는 것 같아 걱정이에요.

네. 그러네요.

오든은 늘 그렇듯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진중하게 마물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쭈글쭈글해진 옷자락 끝을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마물을 퇴치한 자리를 정리한 오든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러지 않으려 했는데도, 자꾸 몇 걸음씩 뒤쳐졌다.

 

무슨 걱정 있으세요, 별지기님?

네?

신전의 벤치에 앉아서 바라본 밤하늘은, 까만 밤바다.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다 오든의 말에 비밀을 들킨 것 같이 부끄러워져 웃고 말았다. 대충이라도 얼버무려야지.

아, 아뇨.

음. 정말이세요? 걱정 있으신 것 같은 얼굴...인데요?

아. 산책을 나온 오든과 하필 여기서 마주치다니. 혼자 있다가 들어가려고 한 건데. 어쩔 수 없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설핏 웃었다. 마음이 깊은 그의 시선이 나에게 닿는 게 느껴졌지만, 구태여 고개를 들지 않고 일부러 발끝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이미 알고 있다.

별지기님, 괜찮으시다면 잠시 옆에 앉아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역시. 그저 웃는 수밖에 없나. 부담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오든은 신전의 인기인이자 유명인이었으니까. 순찰을 가면 오든에게 둘러싸이는 사람들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고, 그의 책상에는 사람들이 보내는 편지와 선물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런 인기인과 나란히 앉아 있는다는 건, 약간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토록 상냥한 사람이 이렇게나 마음을 써 주고 있는데 힘을 내지 않으면 안 돼. 그러나 자꾸 숙여지는 고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별지기님, 제가 큰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걱정이 있으신 거라면 도와드릴게요.

네. 감사해요.

그래도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모두가 나를 이토록 믿어주고 응원해주고 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을 내려놓기가 버거울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가디언 직속 별지기.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에게 주어진 임무. 그러니까 더욱 마음을 단단하게 먹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몸은 마음만큼 따라 주지 않았다. 별의 아이도 아닌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 혼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따라가다 오든의 박수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별지기님?

네?

저, 몇 번 불렀는데요. 역시, 고민이 있으신가 봐요.

아. 하. 하하. 실은, 그게요.

네.

하고 싶었던 말이 몇 번이고 입 안에서 헛돌고 난 다음에야 천천히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내가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려준 그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제가. 도움이 되지 못 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네?

그게... 저는 가디언 직속 별지기잖아요. 그런데, 아무래도 제가 제 일을 제대로 하지 못 하는 것 같아서. 저는 능력도 없고 별지기로서도 부족하고 그러니까... 그래서, 모두에게 그... 짐이 되는 건...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별지기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단호한 말투에 조금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까만 밤 아래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옅은 갈색의 머리. 순하고 맑은 그의 얼굴이 단호하게 굳어 있었다. 정말, 보기 드물게 진지한 모습.

별지기님이 계시기 때문에 저희가 이만큼 일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네?

가디언은 그 시작이 오래되지 않은 기구니까요. 저희도 부족한 게 많아요. 저도 열심히 배워나가는 중인걸요. 게다가, 부끄럽지만, 크루세이더와 피스메이커가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요. 별지기님이 저희롤 도와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더 힘 들이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별지기 일은 별의 아이가 아니어도 할 수 있고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네? 네...

고민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별지기님, 혼자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오늘처럼 말씀해주세요. 가디언 대원들은 별지기님 곁에 있어요. 별지기님의 고민, 들어드릴게요.

그제야 하고 싶은 말을 마쳤다는 듯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차분하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가 인기인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렇게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는 건 간단하지 않은 일인데. 그러자 그에게 힘껏 말해 주고 싶어 졌다. 있는 힘을 다해, 그가 나에게 힘을 준 만큼이나.

저, 저도 들어드릴게요!

네?

고민이요. 오든씨에게 고민이 생긴다면, 저도 들어드릴게요.

그건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는지, 오든은 잠시 멍한 얼굴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얼음 땡 놀이에서 누군가 땡을 외쳐준 사람처럼, 멍한 얼굴에서 깨어나 밝게 웃었다. 그리고는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해주었다.

감사해요, 별지기님. 별빛이 함께하길.

그건, 라하를 믿는 이가 다른 누군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축복의 말이었다. 믿음이 신실한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물론 그가 저렇게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혼자 고민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답을 찾은 결과겠지. 믿음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까. 라하. 이 세계의 신. 나는 라하를 믿는가? 하늘 위를 올려다보며 밝게 빛나고 있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건 잘 모르겠다. 아직 이 세계에 익숙해지는 중이니까. 다만, 누군가의 곁에서 그의 손을 잡아주는 일이 믿음이라면, 그런 믿음은 갖고 싶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그에게 답했다.

별빛이 함께하길.

추운 날씨에 몸을 추스르며 그만 들어가자고 하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낮보다는 짧은 거리감으로. 그의 커다란 등을 보며 걷자니, 괜히 마음이 든든해졌다. 오든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잠시 멈춰 서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 맞아요, 별지기님. 오늘이 윤일이래요.

아. 그, 사 년에 한 번 온다는, 맞나요?

네.

날짜를 확인 안 해봐서 몰랐어요. 그게 올해였군요.

네. 그렇대요. 그럼 이제 사 년 있으면 다시 윤일이 오겠죠?

아마도... 그렇... 겠죠?

음. 저도 고민이 있었는데요. 어쩌죠. 별지기님께 들어달라고 할 걸 그랬나 싶네요. 답을 조금 찾았거든요.

네?

그다음 윤일이 오는 해까지 가디언이 존속할 수 있을까 하는... 하지만 그건, 좋지 않은 생각이었어요. 가디언이 계속 존속한다는 건, 에테르 재난이 끊이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사 년 후쯤에는 가디언이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으면 좋겠네요.

그러네요.

아쉽기도 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재난 그 자체가 사라지는 게 모두의 평화를 위해 더 나은 결론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든의 깊은 마음에 몰래 감탄했다. 역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네...?

나는 어느새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같이 걷고 있었다. 조용히 먼 앞을 바라보는 그의 옆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는 상냥하게 웃으며 조금 부끄러운 듯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말을 꺼냈다.

그다음 윤일이 돌아올 때까지 저희와 함께 해주시겠어요?

함께. 그러니까, 아까 다짐했던 것, 내가 당신들의 손을 잡겠다고, 당신들의 곁에 남아 있겠다고, 그것이 나의 믿음이자 다짐이었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열심히 일 할게요!

밤이 너무 어두웠지만 그래도 헤매지 않고 길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별빛 때문이었다. 올해 오든과 함께 보고 있는 이 별빛이 사 년 후에도 그대로 일지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저 별빛이, 우리가 가야 하는 앞길에도 함께 하기를. 사 년 후까지, 아니 그보다 더 먼 미래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