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텔라비스

[리퀘][로건나인][AU] 감은 눈 위로, 당신의 손이(1)

___hashi___ 2020. 2. 19. 22:01

<1>

눈을 뜨자 창백한 새벽의 빛이 그린 풍경이 보였다. 물결조차 잠든 강 위로 희미하게 물안개가 올라오고 있었다. 창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손 끝에 걸려오는 엷은 공기의 떨림. 창문을 닫았다. 싸늘한 새벽 기운 때문에 어깨가 시렸다.

뭐해?

나지막한 목소리에도 잠에서 덜 깬 몸은 꿈쩍할 생각이 없었다. 왜 이렇게 몸이 무겁지. 그렇다고 다시 침대로 들어가는 것은 내키지가 않았다. 곧이어 로엘의 목소리는 환청처럼 멀어졌고 나는 눈 뜬 채로 꿈속을 헤매는 듯 안개를 바라보았다. 끝내 내가 답이 없자 결국 로엘이 내 손목을 잡았다.

오빠?

아. 미안해. 아직 잠이 덜 깼나봐.

오빠가? 음. 하기야. 오늘은 너어무 일찍 일어나긴 했네. 너어무.

로엘은 놀리듯 ‘너어무’에 강세를 두며 검지 손가락을 세우고 허공을 세 번 짚었다. 스타카토 리듬으로. 너. 어. 무. 알고 있다. 아마 나는 얼굴을 조금 붉혔을 것이다.

너라도 조금 더 자. 나는 잘 마음이 안 들어서.

아니. 괜찮아. 나도 할 거 있어.

할 거?

응. 집에서 책 좀 읽으려고.

집...에서? 책을...? 연구...아니고...? 놀랐지만 애써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얼굴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몰라. 또 다른 마음을 먹고 어디로 나가 버릴지. 뭐, 약학에 대한 책을 읽는 거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상상할 수 있는...일...이겠지? 알게 모르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로엘은 일단 나간다 하면 조용히 산책을 하고 오는, 그런 성격이 아니니까. 얕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애써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피곤하겠네.

아니. 괜찮아. 아! 걱정 마. 정말이야. 난 오늘 정말 안 나가려고 해. 우리 커피 마실까?

그래.

로엘은 꿈꾸는 듯한 느린 보폭으로 사뿐사뿐 멀어졌다. 나는 여전히 창가에 서서 흐린 강 위를 바라보았다. 옛날에는 사공이 모는 배가 이 강을 건너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그 과거를 추억하는 사람들조차 사라지고, 흐린 물안개만이 이 강을 가득 메우고 있다. 강 뒤에 버티고 선 산자락. 굽어 있는 능선 위로 새의 그림자가 낮게 날아갔다.

한 때 가족들과 함께 이 강에서 수영을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붉은 머리에 앳되어 보이는 남자가 그런 말을 했었다. 추억할 수 있는 과거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라고.

 

집안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던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우리 집안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어린 동생과 내가 남은 집은 사람 없는 건물이 세월에 허물어지듯 그렇게 바스라졌다. 친척들은 우리를 맡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늘 앉아계시던 의자를 가져갔다. 어머니가 늘 소중히 다루시던 찻잔을 가져갔다.

그보다 더한 것들은 일찍 없어졌다.

우리는 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 안에 녹아들었다. 그래도 치열하게 부모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아픈 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괴롭힘 당하는 친구를 감싸주었다. 우는 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동생은 나에게 얼빠진 구석이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이런 나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직은 방학이라서 수업 업무는 없다. 애초에 방학에는 연수를 내고 관례대로 쉬는 게 맞지만 새학기가 다가오는 시즌이면 출근을 해야 한다. 나도 다른 선생님들처럼 자리에 앉아 교육과정을 훑었다. 앉은 자리 건너편에서 노곤하게 들려오는 교사들의 잡담 소리.

그거, 알아? 2학년 5반에 걔... 이번에 전학간대.

어머. 진짜요?

도저히 못 견디겠나봐.

교감선생님은 뭐라 안 하세요?

뭐, 사람들이 보는 눈이 있으니까...

하기야. 그것도 그렇겠네요.

나직이 떠돌던 잡담은 곧이어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자판 위에 올려놓았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그 아이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다. 그리고 공무원인 교사들은 현실을 바꿀 마음이 없다.

이게 아닌데.

갑자기 아려오는 정수리 끝에 주먹을 쥐었던 손을 가져갔다. 몇 번 손꿈치로 꾹꾹 눌렀지만, 정수리에 대고 못질을 하는 듯한 통증은 도저히 가라앉지 않았다. 기울기는 했어도, 여전히 우리 집안은 마을에서 명망 있는 편이었다. 우리 남매에게서 모든 것을 가져간 사람들도 많았지만, 우리를 도와준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니까. 조금은 어른이 된 내가 이제 내 역할을 다하겠다고, 쓰러진 이들의 손을 잡아주겠다고, 그래서 교사가 된 것인데. 나는 아직 내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고개를 들자 교사들이 앉아 있는 자리 너머의 창으로 소리 없이 낙하하고 있는 눈송이가 보였다. 겨울. 물안개가 피어오르던 강이 얼겠구나. 로엘은 나를 보고 ‘바아보, 허당이래요~’ 하고 놀렸다.

추억할 수 있는 과거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에요.

잠시 마우스를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당신의 잔영. 당신은 어제 힘 빠진 어깨를 수그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길가의 끝자락만 골라 걸었다. 당신은, 사람이 그리웠으므로, 사람에게서 멀어지고자 했다. 길게 뻗은 손가락은 예뻤지만 손은 거칠었다. 항상 밝게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웃는 얼굴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 몇 겹의 웃음을 걷어내고 나면, 말라 있는 감정을 쥐어짜고 있을까봐. 잠시 겁이 났다.

교사들이 사라졌다. 자리를 나눈 칸막이가, 책상이, 의자가, 공간이 점차 흐려졌다. 눈앞에 떠오르는 건 여전히 혼자 걸어가고 있는 당신의 뒷모습. 잡아줄걸. 당신의 손을 잡아줄걸. 오늘은 당신의 헝클어진 붉은 머리 위로 하얀 눈이 내릴 것이다.

다행이다. 오늘은 있다. 혼자 걸어갈 당신에게 씌워줄, 우산이.